[정동칼럼] 혼돈과 분열의 시대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2021. 2. 5.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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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은 ‘시장의 우상’은 언어와 명칭이 결합해 지성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으로, 언어는 지성에 폭력을 가하고 모든 것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인간으로 하여금 공허한 논쟁이나 일삼게 하고 수많은 오류를 범하게 한다고 갈파한 바 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지난 1일 미얀마에서 군사쿠데타가 발생해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을 구금했다는 외신의 속보가 있었다. 1988년에 귀국한 후 이듬해 군사정권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했지만, 비폭력저항을 이끌어 199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마침내 2010년 말 20년 만에 총선이 실시되면서 석방되었던 아웅산 수지는 한때 미얀마 민주화의 영웅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집권 이후 아웅산 수지는 민주주의나 인권 존중과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였다. 한때 인권유린을 자행한 군사정부와 맞섰다는 게 곧 인권과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음을 보여준 것이다. ‘군사정권’이라는 명칭과 ‘저항’이라는 언어가 결합해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추론에 이르게 하는 지성의 혼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외친 촛불집회를 통해 문재인 정부가 탄생했다.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집권세력이 정경유착과 재벌특혜를 없애고,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열 것이라고 당연히 믿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고 했던 대통령의 취임사는 이런 기대의 결정체였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4년간 재벌에 대한 의존도는 더 심해졌고, 총수 일가에 대한 사법적 특혜도 바뀐 게 없었다. 대통령은 시늉만 한 공정거래3법을 통과시키고는 재벌개혁을 했다고 신년 기자회견에서 말했고, 국회는 위험의 외주화를 근절해 달라는 피해 가족들의 목숨을 건 4주간의 단식에도 아랑곳없이 실효성 없는 중대재해법을 통과시켰다. 금융사기꾼과 권력의 유착 의혹이 꼬리를 물고 있고, 입법 과정과 정책 집행에서의 절차적 정당성은 하찮은 가치가 되어버렸다.

이른바 ‘조국사태’를 계기로 ‘정의’와 ‘적폐’라는 언어가 국민의 지성에 폭력을 가하는 정도를 넘어, 우리 사회를 갈가리 찢어내고 있다. 자신에 대한 엄격한 성찰과 일관성 있는 기준은 내팽개쳐졌고, 내 잘못보다는 너의 잘못이 더 크다는 주장이 자기 정당화로 사용되고 있다. 소셜미디어를 통한 집단사고와 자기 확신은 사회적 소통마저 힘들게 하고 있다.

경제개혁 운동에 참여한 이후 나의 경험은, 진보라는 언어 그리고 보수라는 언어에 의한 혼돈과 오류의 연속이었다. 도대체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진보진영’은 무슨 가치를 대표하는가? 집권 여당인 민주당을 진보세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 ‘보수진영’은 무엇을 지향하는가? 정당 이름을 몇 번이나 바꾼 야당인 국민의힘은 과거와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현 집권 세력들은 경제·사회 문제에 대해 과거 박근혜 정부나 소위 보수 정권과 대동소이하다. 이들은 시장에 대한 이해도 없고, 기본적으로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박정희주의의 신봉자들일 뿐이다. 사회·노동 문제도 기득권자의 시각에서 바라볼 뿐이다. 차이가 있다면, 남북 문제에서 협조적 공조냐 아니면 적대적 공조냐는 정도인 것 같다. 과거 군사독재에 맞서 싸운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이 민주적이거나 정의로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시장의 우상’에 빠진 오류다.

게다가 공허한 언어와 명칭으로 국민을 현혹하고 실제로는 선거기술자일 뿐인 정치인들이 한국의 정치를 주도하고 있다. 여당은 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경제성과 타당성이 검증되지 않은 가덕도신공항 공약으로 국민을 현혹하고 있고, 야당은 한·일 해저터널로 맞받고 있다. 결국 막대한 운영 적자는 국민과 후세대가 모두 떠안게 될 일들이다. 또한 코로나19 대유행으로 피해가 막심한 중소상인과 비정규직·특수고용노동자 등 사회취약계층에 대한 보상 및 지원을 두껍게 해야 한다는 말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전체 국민에게 위로금 명목으로 재난지원금을 지급하겠다는 선거공학적 감언이설이 난무하고 있다.

혼돈과 분열을 뛰어넘는 새로운 정치의 시대가 열려야 한다. 그러나 어설픈 ‘사회 통합’은 또 다른 시장의 우상을 만들 수 있다. 통합은 야합이 아니다. 합리적이고 일관성 있는 기준으로 시시비비를 가리고,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인내하고 포용해야 진정한 사회적 통합이 이뤄질 수 있다. 진보니 보수니 하는 논쟁은 공허하고, 인식과 현실의 불일치만 부추길 뿐이다. 구체적인 비전과 정책이라는 현실 언어로 이야기하는 새로운 정치가 시작되어야 한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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