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의 좋은 작별을 위해..진심을 품은 거짓말, 영화 '페어웰' [리뷰]
[경향신문]
“실제 거짓말에 기반한 이야기(Based on Actual Lie)입니다.”
영화 <페어웰>의 첫 장면은 알쏭달쏭한 안내문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실제라는 걸까, 허구라는 걸까.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장면에서 의미는 조금씩 선명해진다. 뉴욕에 사는 빌리와 중국에 사는 할머니의 통화는 절반이 ‘거짓말’이다. “추운 날엔 머리를 따뜻하게 해야 해.” “모자 썼어요.” “뉴욕에선 귀걸이도 훔쳐간다더라.” “귀걸이 안 했어요.” 걱정 많은 할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한 빌리 나름의 배려다.
하지만 할머니를 생각해서 한 거짓말이 정말 할머니에게도 좋은 것이었을까.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빌리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거짓말에 동참하게 된다. 할머니가 폐암에 걸려 3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가족들은 당사자인 할머니에게 이 사실을 숨기기로 결정한다. “사람을 죽게 하는 건 암이 아니라 공포야.” 전 세계에 흩어져 살던 가족들은 빌리의 사촌동생 결혼식이라는 ‘명분’까지 급조해가며 한자리에 모인다. 그렇게 할머니만 모르는 할머니와의 작별인사(페어웰)가 시작된다.
“좋은 의도이지 않습니까. 중국 가정은 이런 경우 말씀 안 드려요.” 할머니 주치의까지 동참한 이 연극이 빌리는 불편하다. 손자의 결혼 소식에 들뜬 할머니와 초상집에 온 듯 죽상을 한 가족들. 작별인사는 은밀하고 일방적이다. 어쩌면 할머니도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지 않을까. 무엇이 할머니를 위한 선택인가. 빌리의 고민은 깊어진다.
첫 장면이 말해주듯, 영화는 룰루 왕 감독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했다. 왕 감독은 2013년 첫 장편영화를 준비하다 할머니가 시한부 선고를 받았음을 알게 되고, 가족들은 그에게 ‘선의의 거짓말’에 동참하라고 요구한다. “그 당시 <페어웰>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걸 깨달았어요. 파토스와 부조리가 섞인 이야기요.” 왕 감독은 가족들의 거짓말에 가려진 진심을 드러내면서 이에 대한 판단은 유보한다. 대신 불편함을 느끼는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는 가족에게 얼마나 솔직했었냐고.
영화는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과 ‘거짓말은 거짓말’이라는 두 입장이 끊임없이 충돌한다.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과 일본이라는 낯선 땅에 자리를 잡은 두 아들이 두 입장의 대변자 역할을 한다. 스스로를 ‘미국인’이라고 생각하는 첫째 아들(빌리의 아버지)과 어디서든 ‘중국인’임을 잊지 않는다는 둘째 아들(빌리의 삼촌)의 미묘한 입장차. 이는 곧 슬픔을 마주하는 동양과 서양의 차이이기도 하다.
빌리의 고민은 미국과 중국,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인’의 고민으로 확장된다. 한국인 어머니와 중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계 배우 아콰피나(본명 노라 럼)의 호연은 빌리의 입체적 면모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네 살 때부터 할머니 손에 자란 그는 할머니와의 유대관계가 끈끈한 빌리 역할에 미끌리듯 빨려들어갔다고 고백한다. 그는 이 작품으로 지난해 7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뮤지컬·코미디영화 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아시아계 배우로서는 최초의 기록이다.
이 밖에도 <페어웰>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제치고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즈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는 등 전 세계 33관왕을 기록하며 화제를 모았다. 4일 개봉.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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