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해결 의지와 철학 있나"..흔들리는 김명수 리더십
판사들, 국회 탄핵 맞서 기민한 '임성근 대응' 비판도
[경향신문]
김명수 대법원장의 리더십이 최악의 위기에 처했다. 국회의 탄핵 움직임을 의식해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의 사의 표명을 반려한 사실이 임 판사 측의 녹취록 공개로 드러나면서 거짓 해명 사실이 확인됐을 뿐만 아니라 사법농단 문제를 해결할 철학과 의지도 부족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4일 법무법인 해인 소속 윤근수 변호사는 지난해 5월 임 판사와 김 대법원장의 면담 녹음파일을 공개해 임 판사 사표 반려를 둘러싼 진실게임에 쐐기를 박았다. 윤 변호사는 임 판사의 변호인이다. 녹음파일을 들어보면 김 대법원장은 임 판사의 사의 표명과 관련해 “나는 임 부장이 사표 내는 것은 좋다”면서도 “나로서는 여러 영향이랄까, 정치적인 상황도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김 대법원장은 “내가 사표 수리했다 하면 국회에서 무슨 얘기를 듣겠냐 말이야”라며 정치권의 비난 여론을 의식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김 대법원장이 표면적으로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행정권 남용을 비판했지만, 그 역시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김 대법원장은 임 판사 면담에서 사법부와 정치권에서 일던 법관 탄핵 논란에 대한 속내도 드러냈다. 그는 “임 부장 경우는 임기도 사실 얼마 안 남았고 1심에서도 무죄를 받았잖아”라며 “(나는 임 판사가) 탄핵이 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은데, (탄핵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정치적 상황은 다른 문제니까, 오늘 (사표를) 수리해버리면 (국회 등이) 탄핵 얘기를 못 한다. 그런 비난을 받는 것은 굉장히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사법개혁의 소신을 보여주지 못했음은 물론 책임감 있는 사법부 수장의 면모도 보여주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서울의 한 부장판사는 “녹음파일 공개로 자신의 행동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해석될지 눈치를 본다는 사실이 알려졌다”며 “양 전 대법원장의 행동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김 대법원장은 후보자 시절이던 2017년 8월 “저는 31년5개월 동안 법정에서 재판만 했다”고 밝힌 바 있다. 법원행정처 요직을 거치며 인사·기획 등의 업무에 집중했던 전임 대법원장들과 달리, 일선 판사들의 입장에서 사법부를 이끌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번 일이 김 대법원장에게 더욱 뼈아픈 이유다.
사법개혁에 대한 그의 불분명한 소신이 문제의 원인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김 대법원장은 상고제도 개선, 판결문 공개 확대, 법원장 후보 추천제 등의 개혁을 추진했지만, 법원행정처 축소나 사법농단 관여 법관 징계 등 사법농단의 핵심과 관련된 사안에서는 소극적 행보를 보였다. 환경이 녹록지 않았던 측면도 있다. 검찰이 사법농단 의혹 강제수사를 이어가면서 법원 내부에서는 ‘외부자가 사법부를 탄압한다’는 반발감도 형성됐다. 보수 언론·정치권은 대법관 13명 중 6명이 우리법연구회나 민변 출신이라며 이념 성향을 문제 삼았다. 이런 상황에서 김 대법원장은 법원행정처 내 고위 법관들의 조력을 받으며 지난 3년4개월 동안 대법원장직을 수행했다.
대법원은 지난해 10월 국회 추천 비법관 출신 위원이 다수 참여하는 사법행정자문회의가 법원행정에 개입하도록 하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에 위헌 의견을 냈다. 국회의 탄핵과 마찬가지로 법원 외부의 감시와 견제를 사법부 독립성 침해로 보는 이른바 ‘법관 가족의식’을 그대로 드러냈다는 평가다. 법관 탄핵을 최초 제안했던 전국법관대표회의에 참여했던 한 판사는 “사법농단 사태의 본질은 법원 내부에서 재판 독립성 침해가 벌어졌다는 것인데, 어려웠던 여건을 감안하더라도, 김 대법원장은 이 본질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부족했다. 특히 법관대표회의를 통해 나온 사법농단 판사 징계 요구에 대해선 회피로 일관했다”며 “결국 이번 일로 이어졌다”고 전했다.
■일선 판사들 “대화 녹음 공개·거짓 해명 모두 부적절”
‘사표 반려’엔 평가 엇갈려
김명수 대법원장이 4일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와의 대화 내용을 놓고 사실과 다른 해명을 한 점에 대해 사과하자 일선 판사들은 대화를 녹음해 공개한 임 판사의 행동이나 탄핵 관련 발언은 없었다고 거짓 해명을 한 김 대법원장의 처신 모두 부적절하다고 반응했다. 김 대법원장이 대화 과정에서 임 판사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은 것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서울의 한 지방법원 A부장판사는 “녹음한 사람도 대단하고, (녹취 자료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임 판사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한 사람도 대단하다”며 “국민들이 어떻게 법원을 신뢰하겠냐”고 말했다. 한 고등법원 B부장판사는 “막장 드라마”라며 “둘 다 폴리티션(정치인)이다. 판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고등법원 C부장판사는 김 대법원장의 책임이 더 크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법원장은 책임을 져야 한다”며 “법원 수뇌부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사법행정과 재판에 대한 국민 불신을 극대화하고, 사법의 존립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대법원장이 임 판사의 사표를 받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렸다. 정욱도 대구지법 부장판사는 이날 법원 내부망에 올린 글에서 “탄핵이 논의되는 중 사직 수리로 탄핵 가능성을 봉쇄하는 것이 오히려 직무상 의무나 정치적 중립에 위배된다고 볼 여지도 있다”고 밝혔다. 수도권 지방법원의 D판사도 “대법원장이 (임 판사의) 사표를 받아주면 안 된다”며 “검찰로 예를 들어보면, 비위 문제로 재판을 받게 된 사람의 사표를 받아주면 검찰총장이든 법무부 장관이든 책임질 수 있겠느냐”고 했다.
참여연대도 논평에서 “헌법을 위반해 탄핵 사유가 충분함에도 탄핵을 피할 수 있도록 임의로 대법원장이 사표를 수리해줬다면 더 큰 문제가 될 만한 사안이었다”고 밝혔다.
반면 C부장판사는 “대법원장은 판사의 정당한 사표 제출을 정당한 이유 없이 수리하지 않고 일부러 방기한 점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며 “직권남용죄를 적용할 만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박은하·유설희·이보라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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