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할수록 '독립운동사는 위대한 학문' 뼈저리게 깨닫죠"
“한 이름난 학자가 우리가 1945년에 독립한 데는 4대6 정도로 외부 힘이 컸다고 해요. 그 말에 슬펐어요. 우리 선조가 한 독립운동을 왜소화하는 말을 들으면 참 속상해요.”
지난해 말 19년 동안 재직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정년퇴직한 박민영(61) 연구원의 말이다.
그는 1984년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학원에 들어가 독립운동사 연구를 시작했다. 스승인 고 윤병석 교수 권유로 유학자 의병장인 유인석의 행적을 들여다보기 시작해 지금껏 한눈팔지 않고 의병연구에만 힘을 쏟았다. 석사와 박사 논문도 1894년 청일전쟁 이후 봉기해 경술국치 직후까지 이어진 의병전쟁을 다뤘고, <대한제국기 의병연구>(1998) <한말 중기의병>(2009) <화서학파 인물들의 독립운동>(2019) 등 의병을 파고든 학술서도 여럿 냈다. 그는 사학계에서 의병을 전기·중기·후기까지 망라하고 해외 지역까지 살펴 폭넓게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로 꼽힌다.
그가 퇴임을 앞두고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과 보재 이상설 평전인 <임시정부 국무령 석주 이상룡>(지식산업사) <독립운동의 대부 이상설 평전>(신서원)과 지난 20년 동안 의병을 주제로 쓴 글을 모은 <한말 의병의 구국성전>(역사공간)을 한꺼번에 냈다.
지난 27일 서울 송파구 문정동 자택 근처 카페에서 저자를 만났다. 그는 지난달부터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을 맡아 초기 원불교 독립운동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고 했다.
두 평전 모두 대중서라고 하지만 자료를 세밀히 섭렵한 데다 서술도 균형이 잡혀 읽기 편하다고 하자 그는 “두 분의 삶에서 한쪽만 보지 않고 전 시기의 행적을 두루 다루려고 했다”고 받았다.
석주(1858~1932)와 보재(1871~1917)는 항일 독립운동가 중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 인물이다. 안동 명문가인 고성 이씨 종손 석주는 국치 이듬해 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해 74살을 일기로 지린성 서란에서 별세할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그가 이끈 고성 이씨 대가족 중 11명이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았다.
명문가 출신에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들은 보재도 1905년 을사늑약 1년 뒤 북간도 용정으로 망명해 생을 마칠 때까지 미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국내 첫 수학 교과서 <산술신서>(1900) 저자이기도 한 보재는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 특사로 파견돼 일제의 침략 만행을 세계에 낱낱이 알렸다.
“지난해 작고한 윤병석 선생님이 평소 저에게 독립운동 한복판에서 활약한 보재를 널리 알릴 수 있는 평전 집필을 권했어요. 선생님은 1984년에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이상설전>을 냈죠. 재주가 없어 계속 미루다 마침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비 지원을 받아 선생님이 떠난 이후에야 평전을 냈어요. 석주 평전은 김희곤 전 경북독립운동기념관장 요청으로 썼어요. 고향이 경남 함양인 제가 지연과 가문, 혈연으로 얽힌 안동의 복잡한 향토성에서 한 발짝 떨어져 석주를 관조할 수 있다며 집필을 권했죠.”
40년 가까이 독립운동사를 공부한 저자이지만 이번에 평전을 쓰면서 새로 깨달은 것도 많단다. “보재는 1917년에 우수리스크에서 작고하면서 시신도 불태우고 유고까지 없애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유언해요. 전에는 사실 이 의미를 잘 몰랐어요. 그분의 일생을 추적해 보니 그 의미가 다가왔죠. 마지막 순간까지 독립을 염원했으나 그걸 이루지 못하고 작고할 때의 회한이 너무 크고 자책스러워 살았던 존재의 흔적을 다 지우려고 했던 거죠. 존재 자체가 수치스럽다고요. 보재는 마지막까지 독립전쟁을 염원했어요. 석주도 나 죽으면 시신을 국내에 가져가지 말라고 했고 안중근도 시신을 하얼빈 공원에 묻어달라고 했죠. 최고 문벌 가문에서 나 독립운동 최전선에서 활동한 석주와 보재는 자신을 국가와 민족과 동일시한 분들입니다.”
84년 이후 항일 의병전쟁 연구
작년말 독립운동사연구소 정년퇴임
독립운동가 이상설·이상룡 평전 내
“인류보편 가치 추구한 독립운동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자산
80년대보다 독립운동사 대접 못 받아”
그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독립운동사가 위대한 학문이라는 걸 뼈저리게 깨닫는다고 했다. “독립운동가를 추적해 보면 한 분 한 분이 다 위대해요. 그분들의 사상과 행동이 하나같이 위대합니다. 일본과 싸워 이기고 지는 것만이 독립운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극히 피상적이죠. 백암 박은식 선생은 독립운동이 우리 5천년 역사의 정수라고 했어요. 우리 민족이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일제에 맞서 들고 일어난 게 아닙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부당한 침탈에 굴복하지 않고,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고 저항하는 게 독립운동인데 이는 우리 민족의 저력 때문에 가능했죠.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게 수치심과 책임감입니다. 이게 있으면 친일할 수가 없었죠. 이런 독립운동사의 긍정성과 효용적 가치가 갈수록 몰각되고 있어 아쉬움이 큽니다.”
그는 한국 독립운동의 가장 큰 특성으로 ‘인류 보편적인 가치 추구’를 꼽았다. “안중근은 인류 평화의 전 단계로 동양 평화를 말하면서 독립과 동양 평화라는 두 가치에 똑같이 무게 중심을 뒀어요. 백범도 나의 소원이란 글에서 독립된 우리나라가 문화국가가 되길 원했어요. 이웃 나라들과 함께 잘 살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이야기했죠. 이는 한국 독립운동사 대부분에 적용됩니다. 우리 독립운동사는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자산이죠.”
그가 초기엔 유생 중심이었고 1907년 이후 후기엔 군인과 관료, 포수 등 다양한 신분이 참여한 의병 전쟁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의병들은 너무나 정의로운 가치에 바탕을 둬 싸웠어요. 한국 민족과 세계 인류가 공존하는 그런 세상을 꿈꿨어요. 인류 보편적 가치이죠. 영국 언론인 프레더릭 매켄지가 1907년에 의병을 만나고 친일파에서 지한파로 변신합니다. 자기가 생각한 것과 달리 의병들의 이상과 포부가 담대하다는 걸 알았거든요.”
하지만 그가 보기에 우리 땅에서도 독립운동은 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젠 대학에서 독립운동사를 배울 환경도 안 되고 가르칠 사람도 없어요. 독립운동사에 합당한 역사관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가르칠 학자가 있어야 하는 데 별로 없어요. 사회적 인식이나 공부 환경 측면에서 제가 독립운동 공부를 시작한 80년대보다 못해요. 제대로 된 나라라면 독립운동을 가르치는 학과가 따로 있어야 합니다. 독립운동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역사 자산입니다.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학문으로 정착한다면 대한민국도 많이 바뀔 겁니다.”
그가 평생 공부한 의병을 두고는 이런 말을 했다. “역사 전공자 중에서도 의병전쟁이 아니라 의병운동이라고 쓰는 분들이 있어요. 의병을 왜소하게 평가하는 걸 보면 무척 속이 상합니다. 의병전쟁 20년을 포괄해보면 우리 국민과 일본 사이의 선전포고 없는 총력전이었어요. 그때 일본도 의병 탄압하는 상보를 전투일지라고 불렀어요. 1940년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 때 의병전쟁에서 죽은 조선인 숫자가 50만명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는 보고도 있었죠. 의병은 독립운동의 시작이고 그 뒤로 독립운동이 흔들림 없이 장기지속할 수 있는 바탕이었죠. 의병과 독립군, 광복군은 굵은 선으로 연결됩니다.”
연구가 절실한 독립운동사 분야를 묻자 그는 “독립운동사 전체가 다 비어 있다”고 했다. “해방 이후 배출된 독립운동사 전공자가 많지 않아요. 각 분야를 조금씩 개척한 상태죠.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독립운동사 전체 자료집을 만드는 것입니다. 임시정부 등 분야별로만 자료집이 일부 있어요. 국가 역량을 동원해 수백 권이 되는 전체 자료집을 만들면 그 과정에서 연구인력이나 연구역량도 키울 수 있겠죠.”
그는 애초 대학원에서 성리학을 전공할 계획이었단다. “윤병석 선생님이 유학자인 유인석 의병장 연구를 권하는 바람에 의병이 제 평생 연구 주제가 되었죠. 어릴 때 산 고향 함양군 유림면에는 상투에 갓 쓴 분들이 많았어요. 조선 사회와 비슷했죠. 어릴 때 환경이 저의 삶에 영향을 미쳤죠.”
‘마음 속에 가장 크게 자리한 독립운동가’는 누구인지 궁금했다. “특정해 말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어요.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안중근일 수도 있고 이상설, 이동휘일 수도 있죠. 굳이 말하자면 저한테 표상이 되는 인물은 면암 최익현(1833~1907)입니다. 면암은 명분과 의리를 가장 존숭했던 화서 이항로 문하에서 공부한 정통 선비이죠. 국가와 민족의 존엄을 자신과 일체화한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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