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대법원, 나치가 가져간 중세 보물 돌려달라는 유대인 소송 퇴짜
"나치 인종청소의 일환" 주장했지만 "미국법원 관할 사항 아니다"며 독일 손 들어줘
1930년대 독일 나치 정권이 유대인 미술상으로부터 사들인 중세 기독교 보물인 ‘겔프 보물(Guelph Treasure)’의 소유권을 두고 유대인 후손과 독일 정부 사이에 벌어진 소송에서 미국 대법원이 하급심을 깨고 독일의 손을 들어줬다. 원고들은 “나치의 탄압으로 부당하게 강탈당했다”고 주장했지만, 미 사법부는 “미국 법원이 판단할 사안이 아니다”라며 ‘주권면제’ 원칙을 적용했다.
미 대법원은 3일(현지 시각) 앨런 필리프 등 원고 3명이 독일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원고들은 1920~30년대 독일에서 활동한 유대인 미술상들의 후손으로 상속권을 물려받았다. 이 재판은 나치 정권의 유대인 탄압을 시대적 배경으로 전설적 보물의 소유권을 다퉜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나치 시대와 옛 기독교 금은보화를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영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를 떠올리게도 했다.
유대인 후손들이 1·2심에서 내리 이기며 승세를 굳히는 듯 했지만, 대법관 9명의 만장일치로 하급심 결과를 뒤집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대법원 판결의 요지는 “이 소송은 미국 법원에서 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금지하고 있는 연방정보감시법(FISA)에 저촉되기 때문에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앞서 지방법원과 연방항소법원은 연거푸 “FISA의 예외로 둘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반환 소송을 진행할 수 있다”며 유대인 상속자들의 손을 들어줬지만 최고심이 180도 뒤집은 것이다. ‘겔프 보물’은 11~15세기에 만들어진 십자가와 장신구, 제단 등 82개의 장식품으로 구성돼있다.
현재 독일 베를린 국립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국외로 반출할 때 문화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국가 보호 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이 보물이 독일 정부로 오는 과정에서 나치의 강탈이 있었다는 주장이 원 소유자였던 유대인 미술상 후손들로부터 제기됐다. 겔프 보물이 독일 정부 소유가 된 내력은 이렇다. 1920년대 독일에 거주하던 미술품 거래상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1929년 겔프 보물을 사들였다. 하지만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컨소시엄은 겔프 보물의 절반은 네덜란드에 보관하고 나머지 절반은 매물로 내놓았다. 그런데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 말 프랑크푸르트 시장이 겔프 보물을 구매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편지를 보냈고, 2년 뒤 컨소시엄은 42개를 나치 독일 측에 170만 달러 상당 금액에 팔았다.
현재 겔프 보물의 가격은 2억5000만 달러(약 2795억원)으로 평가된다. 매입금액은 당시 화폐 가치를 따져봐도 저렴하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유대인 후손들은 이 거래에 대해 “나치의 강압으로 헐값에 강탈당한 것”이라고 주장해왔고, 반면 독일 정부는 “정당한 협상에 따라 이뤄진 공정한 거래였다”고 반박해왔다. 후손들은 2014년 겔프 보물이 나치 정권의 약탈 미술품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며 독일 정부에 반환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미국 법원에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그런데 이 소송이 정상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법적으로 해결해야 할 절차가 있었다. FISA법은 일반적으로 미국 법원에서 다른 나라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제한한다. 반환 소송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예외 조항인 ‘국제법을 위반한 몰수(expropiration)행위’에 해당돼야 했다.
“겔프 보물이 헐값에 넘어간 것은 나치의 제노사이드(genocide·종족학살)의 일부이고 이는 국제법 위반 행위”라는 원고들의 주장에 대해 1심과 2심은 FISA가 적용의 예외를 받는 몰수조항에 해당한다고 봤다. 하지만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존 로버츠 미 대법원장은 직접 쓴 16페이지 짜리 의견서에서 이번 소송이 미국 법원에서 진행될 수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그는 우선 “국제법적으로나 미국의 대외정책을 봤을 때 FISA법이 규정한 국제법 위반 몰수 조항에 한 나라가 자국민의 소유물을 가져간 사례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법적 합의가 있다”며 “1976년 FISA법이 시행됐을 때 예외가 적용되는 명확한 몰수조항은 한 국가가 외국인의 재산을 가져갔을 때일 뿐”이라고 했다.
대법원은 “의회가 FISA법 예외조항을 둔 취지는 인권 탄압 행위를 제재하는 것이 목적”이라고도 했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미국 사법부는 ‘미국법은 국내에만 적용이 될 뿐, 세상을 지배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해왔다”고 말했다. 대법원 결정에 독일 측은 즉각 환영 입장을 밝혔다. 겔프 보물을 소유하고 있는 프러시안 문화유산 재단의 헤르만 파르징거 회장은 “이 재판이 미국 법원에서 열리지 않아야 한다는 오랜 믿음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번 판단으로 인해 10여년째 이어진 겔프 보물에 대한 반환 소송이 마무리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번 대법원의 판단은 “미국 법원에서 진행할 수 없는 소송”이라고 선을 그은 것일 뿐이기에, 원고 측이 어떤 형태로든 반환 시도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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