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로] '報國'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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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 1세대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군담소설을 보는 듯 흥미진진하고, 어떨 때는 위인전처럼 존경심이 우러나오기도 한다.
이런 1세대 창업주들의 이야기 속에는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있는데, '나라에 보답한다'는 의미의 '보국'(報國)이다.
창업주의 시대가 저물고 3~4세 경영인들이 전면에 등장한 지금도 여전히 이 '보국'은 기업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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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재계를 주름잡는 대기업들은 대부분 해방과 전쟁 이후 잿더미 속에서 탄생했다. 아무 데도 기댈 곳 없던 시절 한 청년이 맨몸으로 기업을 일으켜 1960~1970년대 고도성장기에 소위 '재벌' 집단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는 실제 드라마로 제작됐을 만큼 재미난 소재이기도 하다.
이런 1세대 창업주들의 이야기 속에는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있는데, '나라에 보답한다'는 의미의 '보국'(報國)이다. 그 이면에는 박정희 시대를 거치며 일본에서 가져온 '청구권 자금'의 혜택을 받고 컸으니 이를 국가에 갚아야 한다는 당시 정권의 압력도 있었을 것이다.
삼성을 일으킨 이병철 창업주의 기업가 정신은 '사업보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1976년 11월 전경련 회보에 게재된 기고문 '나의 경영론'에서 "나의 갈 길은 사업보국에 있다"고 썼다. 이후 사업보국은 삼성의 경영이념을 대표하는 말이 됐다.
이 밖에 신격호 롯데 창업주는 '관광보국',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는 '수송보국', 이종근 종근당 창업주는 '약업보국'등 웬만한 창업주들은 각자 주특기를 살린 이 보국 시리즈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1970년대 허허벌판에 세워진 포스코의 창업이념도 '제철보국'이다.
창업주의 시대가 저물고 3~4세 경영인들이 전면에 등장한 지금도 여전히 이 '보국'은 기업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틈날 때마다 선대의 '사업보국'을 이어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것을 공언해 왔다. 최근 대한상의 회장으로 추대된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국가를 위해 할 일을 고민하겠다"는 말을 첫 각오로 내놨다.
2019년에 정부가 내놓은 '제조업 르네상스 비전 및 전략'은 시스템반도체, 미래차, 바이오 등 3대 핵심 신산업을 육성한다는 게 골자인데, 이는 삼성전자의 시스템반도체 2030 전략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133조원을 투자한다는 삼성을 빼놓고는 얘기가 안 되는 정책인 셈이다. 미래차 역시 전기차와 자율주행차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현대차그룹과의 협력 없이 성과를 낼 수 없는 분야다. 고용과 경기한파가 몰려올 때마다 기업들에 마중물 역할을 요청하는 것도 모든 정권이 한두 번 해본 일이다.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성장해온 데 대기업들이 일조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문병준 경희대 경영대학 교수는 '한국 주요 대기업의 창업이념과 기업가 정신의 비교연구'에서 "우리나라의 산업화 역사는 창업 기업가들이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위기를 기회로 바꾼 고난의 성장사"라고 규정했다.
기업들에 있어 보국은 벗어버릴 수 없는 등짐 같은 존재다. 하지만 대가를 바랄 수 없기에 외로운 길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국내 경기회복을 위해 130조원을 한국에 투자하고, 4만명을 직접고용하는 역대급 경기부양책을 완수했지만 결국 사법리스크에 발목이 잡혀 수감돼야만 했다.
바야흐로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모두의 힘이 필요한 시대가 됐다. 기업인들에 대한 지나친 징계와 처벌에 대해 회의적인 여론이 일고 있는것은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기업들이 다시 한번 '보국'을 할 수 있도록 정부와 정치권의 현명한 판단이 필요한 때다.
ahnman@fnnews.com 안승현 산업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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