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아리랑꽃 피어날까요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무언가를 찾아서 떠나기 마련이다. 무작정 길을 떠나는 사람도 있고 꿈을 찾아, 사랑을 찾아 떠도는 사람도 있고 돈을 찾아 떠도는 사람도 있다. 나도 그렇게 먼 길을 떠난 적이 있었다. 1994년 봄으로 기억이 된다. 겨레의 숨결이 깃든 노래를 찾겠다고 무작정 백두산으로 떠났다. 하지만 부푼 기대와는 달리 산신령한테 실컷 야단만 맞고 쫓겨났다. 두 해 뒤 여름에 다시 백두산에 올랐다. 이번에는 따뜻하게 받아 줄 거라 믿으면서. 다행히 산신령의 꾸지람도 없었고 날씨도 내 마음을 따라 주었다. 옥에 티라면 관광객들이 남기고 간 어지러운 발자국들이었다.
텅 빈 백두산에 적막이 흐르자 제 차례인 양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어지럽던 발자국들은 마술처럼 지워졌다. 마치 나를 위해 하얀 카펫을 깔아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새하얀 평화를 위하여 누군가의 첫발자국을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나를 받아 주겠다는 산신령의 뜻 같기도 하였다. 산 아래는 여름이지만 산 위에는 그렇게 하얀 눈이 내렸다.
눈 그친 하얀 눈 위에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나는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평화를 조심스레 밟으며 천문봉(2670m)으로 향했다. 첫발자국의 주인공이 내가 될 줄이야! 어둠은 빛을 해치는 악마라고 배웠는데 내가 본 어둠은 빛을 살리는 천사였다. 이런 어둠이라면 평생 함께 살아도 좋을 것 같았다. 세상은 왜 어둠을 혐오할까? 어둠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빛을 따르는 사람들이 버릇처럼 어둠을 밀어내려는 모습을 보노라면 무슨 편 가르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능선 너머 달빛이 나를 불렀다. 능선에 오르니 엄청나게 밝은 달이 나를 반겨 주었다. 안개 때문에 보기 힘들었던 하늘못(天池)을 이렇게 훤히 볼 수 있다니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동안 그림자를 잃어버려 죄책감을 느끼고 살았는데 이렇게 백두산에서 다시 만나게 되다니! 마음속 깊이 숨어있던 샘에서 기쁨이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오른쪽 능선을 따라 조금 걷다가 넘치는 기쁨을 가라앉히려고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달이 얼마나 밝은지 눈이 부셔서 샛눈으로 달을 쳐다보았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달과 나 사이의 거리가 백 미터도 안 되는 것 같았다. 마음만 먹으면 내가 달을 어루만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태어나서 처음 보는 눈부신 달 앞에서 나는 넋을 잃고 말았다. 선녀와 나무꾼이 생각났다. 조금만 기다리면 정말 선녀들이 두레박을 타고 내려올 것 같았다. 산 아래서 보던 달하고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 크기도 다르고 밝기도 다르고 혹시 광약으로 달을 닦은 것 아닐까? 목욕탕에 다녀 온 아내의 뽀송뽀송한 얼굴처럼 달 표면에서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달빛에 물든 봉우리에서도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불현듯 한라산 반달이 생각났다. 한라산 반달하고 백두산 반달이 서로 만나면 커다란 보름달이 되겠지. 그러면 그 커다란 보름달이 겨레의 마음속을 훤하게 비춰 주고 어루만져 주겠지. 가난했던 내 겨레, 이제 보름달로 하나 되나니 축복이로다! 하지만 통일이 먹구름 속에 갇혀 있으니 그것이 또 문제로다. 언제쯤 먹구름이 흩어져 통일의 예쁜 얼굴을 볼 수 있을까?
남쪽은 남쪽대로 북쪽은 북쪽대로 통일을 바란다지만 그 놈의 욕심들 때문에 먹구름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헛된 꿈을 믿느니 차라리 백두산 반달과 한라산 반달이 만나서 보름달 되는 것이 훨씬 더 빠르겠다. 아니지 우리가 그렇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어야겠지. 남북이 서로 껴안지 못하니 통일은 빛 좋은 개살구 아닌가. 그럴 거면 처음부터 통일이라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지. 그깟 왕 노릇 하려고 통일을 가두어 놓다니……
하지만 꽃들은 사람들하고 다르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혹시 아는가? 남쪽의 꽃바람과 북쪽의 꽃바람이 서로 만나 아리랑꽃을 피울지? 나라꽃이라는 게 그 나라를 상징하는 꽃이어야 하는데 무궁화는 추운 북쪽에서는 잘 자랄 수 없다. 내 생각으로는 진달래가 좋을듯하나 무슨 꽃이 되었든 그것이 아리랑으로 피어나야 나라꽃이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 아니라 ‘아리랑 삼천리 화려 강산’으로 말이다.
북쪽 하늘 남쪽 하늘 서로 하나 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꽃들에게 우리의 소원을 빌어 보는 것이 어떨는지?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고 말들 하지만 진정 그런 마음을 지닌 사람 몇 명이나 될까? 통일을 납치해서 먹구름 속에 가두어 놓고는 서로 자기네 것이라고 싸우고 있는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애들 병정놀이도 아니고 세상에 이런 코미디가 또 있을까 싶다. 이제 통일은 남북 대표가 두는 장기판의 상품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는 아직도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고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겨레여! 우리는 언제까지 그들의 장기판 들러리를 서야 한단 말인가.
포장된 통일! 사람들은 통일을 보지 않고 통일을 감싼 포장을 보지. 통일은 겨레의 숨결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어떻게 포장지로 통일을 감쌀 생각을 하는 건지. 나는 그런 통일 기대하지도 않을뿐더러 바라지도 않는다. 그런 통일을 기다리다가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나도 늙어버렸고 겨레의 기다림도 그리움도 모두 다 늙어버렸다. 이제 믿을 건 백두산 반달과 한라산 반달이 만나 커다란 보름달을 이루는 것과 남녘의 꽃바람과 북녘의 꽃바람이 만나 아리랑꽃을 피우는 것뿐이다. 내 나라가 보름달이 되면 먹구름은 저절로 흩어질 테고 삼천리강산에 아리랑꽃 피어나면 통일은 예쁜 얼굴 되찾으리라. 겨레여, 우리 모두 그런 날이 오기를 두 손 모아 빌어 보자!
한라산 반달
백두산 반달
서로 만나면
보름달이 되리라
비춰라, 비춰라
삼천리강산에
한마음 내 겨레
보름달이 되었네
북녘의 꽃바람
남녘의 꽃바람
서로 만나면
아리랑꽃 되리라
피어라, 피어라
삼천리강산에
하나 되는 내 나라
아리랑꽃이여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꽃이여
-「아리랑꽃」, 2012
글 한돌(<홀로아리랑>과 <개똥벌레>, <조율>의 작사·작곡가)
***이 시리즈는 전남 순천 사랑어린학교장 김민해 목사가 만드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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