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만화인 듯 음식 만화 아닌 음식 만화
보충재 위에 플라스틱 쌀과 접착제를 섞어 올린다. 깨 모형을 검은색으로 도색해 그 위에 톡톡 뿌린다. 에폭시 소스를 이용해 국물이 적은 광양식 불고기를 표현하고 소시지 감자볶음, 볶음김치, 콩나물 모형을 함께 담는다. 당장이라도 숟가락을 들어 퍼 먹고 싶은 광양식 불고기 도시락이지만, 당연히 먹을 수 없고 먹어서도 안 되는 ‘모형’이다.
푸드 코트나 카페, 전시관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음식 모형은 만들어두면 곧 부패하는 진짜 음식을 대신해 완성된 음식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게 도와준다. 최근에는 많은 식당이 LCD 화면으로 대체하고 있지만, 실제보다 더 실제처럼 만들어진 음식 모형은 여전히 입맛을 돋구는 일등공신이다.
그렇다 해도, 고독한 미식가, 미스터 초밥왕, 요리왕 비룡, 식객, 신의 물방울까지, 온갖 음식들이 만화의 주인공으로 나설 때도 이 ‘가짜 음식’이 음식 만화의 소재가 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최근 출간된 김정연 작가의 ‘이세린 가이드’는 독특하게도 음식 모형을 소재로 내세운 만화다. 데뷔작이었던 웹툰 ‘혼자를 기르는 법’으로 2016년 ‘오늘의 우리 만화상'을 수상하며 한국 만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던 김정연 작가가 새롭게 내놓은 작품이다.
차기작의 소재로 ‘음식 모형’을 택하게 된 계기도 흥미롭다. 전작의 연재를 끝낸 후 독일로 향한 작가는 그곳에서 한국 음식에 대한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 매일같이 비빔밥을 소개하는 나날의 연속 끝에, 자연히 “한국 음식은 나라는 사람의 어떤 부분을, 어떤 방식으로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몰두하게 됐다. 맛에 관한 감상은 목적 밖이었기에, ‘맛’을 빼놓고 음식 이야기를 할 방도를 고민하다 결국 음식 모형 제작자 이야기를 택하게 된다.
전작이 서울에서 혼자 살아가는 20대 사회초년생 여성의 삶을 가감 없이 그려냈듯, 이번 작품 역시 ‘음식 모형’이라는 소재를 경유하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음식 모형 제작자’라는 직업을 가진 한 여성의 삶이 핵심이다.
주인공 이세린은 사형주조 기술자였던 할아버지, 의수족 제작자였던 아버지, 분양 모형 제작사를 차린 큰오빠, 특수분장을 하는 작은 오빠 등 유달리 ‘가짜’를 만드는 데 일가견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다. 어린 시절에는 자연사박물관에 소속된 모형 제작자가 되고 싶었지만, 한국에서 자연사박물관 건립이 번번이 좌절되는 탓에 모형 음식 제작자의 길에 들어선다.
만화는 캘리포니아롤에서 비빔밥, 배추김치, 곶감과 굴비, 떡국과 미역국 불고기 도시락을 거쳐 주말 전골 등 총 열 다섯 가지 메뉴 안에 이세린의 삶의 편린을 함께 곁들여 차려낸다. 번데기 모형을 제작하면서는 증손자의 생식기(고추) 조형물을 만들게 시켰던 할머니를 떠올리고, 모둠 튀김 모형을 만들면서는 마른 체형을 숨기기 위해 두꺼운 옷으로 몸을 가렸던 자신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느낀다.
곶감과 굴비 모형에 색을 입히는 도색 작업은 회색 도시의 조화들과 겹쳐지고, 쌀밥을 만들면서는 절대 잔반을 남겨서는 안 됐던 학창시절을 회상한다. 음식 모형을 매개로 줄줄이 꿰어지는 이야기는 작게는 이세린의 가족사부터 가부장제, 남아선호사상, 섹스돌, 바디셰이밍 같은 사회적인 주제까지 확장된다.
자칫 하나의 거대한 농담처럼 느껴질 수도 법한 이 상차림을 생생하게 만드는 비결은 전문적으로 그려낸 음식 모형 제작의 세계다. 각 메뉴들의 제작 과정이 매우 상세하고 전문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직업 탐구 만화로도 손색없다. 마냥 명랑하지만도, 그렇다고 마냥 우울하지만도 않은 주인공 이세린 캐릭터 역시 만화에 독특한 매력을 더한다.
물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차려낸 작가의 연출이 이 만화의 가장 큰 미덕이다. 다양한 음식 모형과 함께 끝없이 이어지는 이세린의 독백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샌가 모형 음식이 삶의 가장 적절한 비유처럼 느껴지게 된다. 단맛과 쓴맛 같은 ‘맛’을 전부 소거하고도 음식 안에 인생을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을 작가는 보여준다. 음식 만화인 듯 음식 만화 아닌 이런 음식 만화는 이전에도 앞으로도 아마 김정연 작가만이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독자는 그저, 이 유일무이한 요리를 기꺼이 감상하면 그뿐이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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