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와 문인 '찐 우정'..암흑기 예술꽃 피우다

전지현 2021. 2. 4.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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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展
시인이자 사업가 김광균
김환기·최재덕 등 그림 구입
화가들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
구상 시인에 얹혀산 이중섭
보답으로 가족화 선물
시인이자 사업가 김광균이 구입한 김환기의 `달밤`. [사진 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1952년 7월 6일 시인이자 사업가 김광균의 부산 건설실업주식회사 사무실 벽에 푸른 달 그림이 걸려 있었다.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은 김광균 전집에 나온 이 사진을 보고 그의 딸이자 매듭장인 김은영을 찾아갔다. 그림의 정체는 1951년 김환기 작품 '달밤'이었다. 부산 피난 시절에 화가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김광균이 김환기에게 구입한 그림이다.

김 팀장은 "김광균은 자주 화가들과 술을 마시며 어울렸다. 잔뜩 취한 달밤에 자기 그림자를 따라가다 강물에 빠져 지나가는 군인 덕분에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면서 "김광균이 '1930년대 시는 음악보다 회화이고자 하였다'고 했을 정도로 그림의 영향을 많이 받은 시를 썼고, 독학으로 서양미술을 공부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화가이자 수필가 김용준의 기명절지 10폭 병풍을 설명하고 있는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 힘든 시기에 서로의 영감이자 버팀목이 된 문인과 화가의 우정이 미술관에 전시된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기획전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는 1930~1950년대 정지용, 이상, 박태원, 김기림, 이태준, 김광균 등 문학가와 구본웅, 황술조, 김용준, 최재덕, 이쾌대, 이중섭, 김환기 등 화가들의 지적 연대를 조명한다. 학예사들의 피땀과 눈물 덕분에 오랜 먼지와 기억을 뚫고 나온 보석 같은 문화예술의 결정체들이며, 여러번 봐야 하는 대규모 전시다. 작품 140여 점과 자료 500여 점으로 구성됐다.

조영복 광운대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와 협업한 김 팀장은 "캐면 캘수록 계속 나오는 고구마 줄기처럼 방대한 자료가 나왔을 정도로 문인과 화가의 교유가 상상 이상의 예술 성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김광균은 김환기를 비롯해 국민 화가 이중섭, 월북 화가 최재덕 등과도 끈끈한 사이였다. 화가들의 안 팔린 전시작을 김광균 사무실에 놓고 가면 구입해줬을 정도로 인심이 넉넉했다.

최재덕 '한강의 포플라 나무'
특히 김광균이 소장했던 절친 최재덕의 1940년대 그림 '한강의 포플라 나무'가 이번에 처음 공개된다. 섬세한 색채로 변주하는 포플라 나무가 한강을 뒤덮은 작품으로 대담한 화면 구성이 돋보인다.
이중섭이 얹혀살았던 구상에게 선물로 그려준 `시인 구상의 가족`.
이중섭은 오랜 친구이자 시인인 구상의 집에 얹혀살기도 했다. 1955년 1월 개인전이 실패하자 절망에 빠진 이중섭은 일본에 있는 아내와 연락마저 끊고 경북 왜관의 구상 집에 머물렀다. 이번 전시작 '시인 구상의 가족'은 그 보답으로 선물한 그림이다. 자전거를 사서 아들을 태워주는 구상을 부러워하는 이중섭 자신도 그렸다.

실의에 빠져 애용하던 붉은색 물감을 버리고 노란색 물감을 수없이 쌓고 긁어서 완성한 작품이다. 김 팀장은 "그림에서 등지고 강가를 바라보는 소녀는 소설가 최태응의 딸로 이중섭과 같은 처지였다. 의사 아내를 둬서 경제적 여유가 있던 구상이 친구들의 버팀목이었다"고 설명했다.

정현웅이 그린 백석 시집 표지. [사진 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백석의 시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표지에 그린 정현웅 작품도 걸작이다. 제한된 색채 인쇄로 눈이 푹푹 내려앉은 밤의 정경을 그려냈다. 우두커니 앉아 있는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천진한 모습은 이 시가 지닌 그리움의 정서를 배가한다. 두 사람은 조선일보사 옆자리에 앉아 일하면서 친해졌다고 한다. 정현웅은 늘 바라보던 백석의 옆 얼굴을 그려 잡지 '문장'에 발표했고, 백석은 만주 여행 중 지은 시 '북방에서'를 정현웅에게 헌정했다.
구본웅이 이상을 그린 `친구의 초상`.
1930년대 경성에서 다방 '제비'를 운영하면서 문인과 화가들의 구심점이 된 시인이자 죽마고우 이상을 그린 구본웅의 초상화도 전시장에 걸렸다. 구본웅이 직접 운영한 인쇄소 겸 출판사 '창문사'에 이상을 취직시키기도 한다.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 표지와 속지를 찍은 동영상을 함께 전시한 것도 눈길을 끈다. 문예지 '현대문학' 표지에 실린 유명 화가의 그림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1955년 창간호를 비롯해 가장 많은 표지를 그린 김환기 '자화상' 등 20여 점이 이번에 처음 공개된다. 전시는 5월 30일까지.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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