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인 칼럼] 이 모멸을 멈추지 못하면

한겨레 2021. 2. 4.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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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은 모멸받는 이의 영혼을 팽개치지만, 팽개쳐진 영혼들이 다시 일어설 때 그 상처받은 영혼들의 손에 들려질 것이 한갓 낫뿐일까 싶다. 지금 이 땅에는 시민적 성원권을 얻지 못한 채 겨우 존재하고 있을 뿐인, 다쳐도 죽어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철탑과 굴뚝 위에 올라가도 좀처럼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사는 게 모멸인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오랜 투쟁 끝에 정규직 유지, 직접고용이라는 승리를 얻어냈던 도로공사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원직인 요금수납직으로 복귀한 것이 아니라 업무지원직이라는 이름으로 환경정비, 주차장 관리 등 낯선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뉴스로 듣는 동안 나는 얼마 전 읽은 젊은 작가 김혜진의 장편소설 <9번의 일>이 떠올랐다. 이 소설에는 통신회사의 중견기술직으로 26년 동안 근무해오면서 회사의 성장과 자신의 경력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한 노동자가 구조조정에 따른 사직 권유를 거부하면서 자기 업무에서 배제되고 몇 차례에 걸친 재교육 과정을 거쳐 계속되는 임금 삭감과 더불어 수도권 변두리 영업직으로까지 좌천되어가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현실과 허구에 걸친 두 개의 에피소드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광범하게 자행되고 있는, 합법의 허울을 쓴 사실상의 부당노동행위에 관한 이야기들로서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내용들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일화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여전히 낯설고 그 부당성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마치 내가 그런 일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심한 모멸감을 느낀다. 그렇다, 그것은 모멸감이다. 모멸감이란 누군가 자신의 자존감을 짓밟을 때 발생하는 감정이다. 고용자로부터 이러한 처분을 당하게 될 때 피고용 노동자들은 일상과 생계의 지속불가능성으로 인한 불안감은 물론이거니와 무엇보다 자기가 한 사람의 존엄한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서 오는 모멸감에 더 고통을 받게 된다. 불안이 사람의 영혼을 서서히 잠식해 들어온다면 모멸감은 사람의 영혼에 침을 뱉고 땅바닥에 내팽개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자기 삶을 스스로 영위하는 행위로서 기쁨의 원천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노동력이란 이름의 상품으로 자본가에게 판매하여 임금과 교환하는 하나의 피치 못할 고역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익숙해진 노동은 노동자 자신에게는 인생의 보람이자 자존감의 근거가 되어주는 바가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런 식으로 격하되고 멸시될 때, 노동자들에게는 도대체 무엇이 남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 세계는 모든 인간이 자유, 평등, 연대의 정신 아래서 존엄성을 지키고 살아가야 한다는 시민혁명의 이념과, 자본가-노동자 간 지배-피지배의 불평등 상태를 기본 토대로 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매우 불편하게 공존하고 있는 세계이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체제가 형성 발전되어오는 동안 이러한 모순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많은 노력이 이루어져왔다. 마르크스에 의해 정식화된 ‘과학적 사회주의’의 핵심도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의 활력을 유지하되 사적 소유의 철폐로 그 내재적 모순을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굳이 사회주의가 아니더라도 자본주의의 역사 속에는 자본가계급에 의한 노동자계급의 지배가 적나라한 인격적 지배로 회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많은 ‘선량한’ 노력도 존재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심지어 자본가들조차 적어도 겉으로는 자신들이 노동자들의 인격적 존엄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을 하며,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반사회적 자본가로 낙인찍히는 것은 가급적 기피해온 것 역시 사실이었다. 오늘날 이른바 선진국의 조직된 노동자계급이 자본가들과 이윤은 물론 윤택한 시민적 생활 조건도 공유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른 것도 노동자들의 투쟁의 과실이기도 하지만, 자본가들의 유전자 속에 얼마간이든 자유 평등 연대의 기치 아래 봉건 체제를 전복했던 시민혁명 시기의 기억이 남아 있고, 민주주의 정치제도와 사회, 문화, 교육 영역에서 그 기억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축적되어온 것에 힘입은 바가 적지 않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자본주의의 거듭된 개정사 속에서 유독 악랄한 말기적 버전으로 보이는 이유는 바로 자본가계급을 이러한 시민혁명의 기억, 즉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며 연대해야 한다는 이 대전제로부터 해방시켜준 체제이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 세계시장 개척의 한계에 봉착한 자본주의가 선택한 또 하나의 개정판으로서의 신자유주의는 결국 시민을 다시 시민과 비시민으로 분할하여 그 차이에서 잉여를 발생시키는 방법을 선택했다. 인간은 모두 자유롭고 평등하지만 그것은 그가 자기 계발을 통해 제한된 시장 시스템 안에 안착할 경우에만 해당되며, 그렇지 못하면 그는 시민사회에서 성원권을 가지지 못한 비시민으로 전락하되, 그 책임은 전적으로 그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 신자유주의 체제의 인간관의 핵심이다. 그 인간관은 무엇보다 노동자계급 내에서 주밀하게 반영되는데, 이전에는 설사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릴지언정 모두 정규직이었던 노동자들이 이제는 정규직 외에 비정규직, 기간제, 임시직, 파견직, 특수고용직 등으로 차등분할된 상태에서 불안과 모멸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나마 시민혁명의 기억과 노동자들의 인정투쟁 전통이 남아 있던 서구 사회에서는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속에서도 노사협의제도, 비정규직 우대, 각종 실업 대비 안전장치 등 노동자들을 시민적 보편권리의 주체로 인정하려는 사회적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는 반면, 근대적 시민혁명의 전통도 없고 노동운동의 역사도 일천하며, 사회적 위기 때마다 구성원의 일부를 희생시키는 잔학한 전통이 유구하던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 헤게모니는 유난히 더 잔인하게 사회적 약자들을 배제하고 탈락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는 자본과 시장의 존속을 위한 경제적 기획으로서가 아니라, 마치 사회구성원들을 분할하고 차별하고 자존감을 꺾어 영원히 착취 가능한 노예적 노동기계로 만들기 위한 사회심리적 기획으로서 더 잘 기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야만적 기획이 언제까지 지속가능할까? 시인 김남주는 그의 작품 ‘종과 주인’에서 주인이 종에게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고 하자 종은 그 낫을 들어 주인을 베어버렸다고 썼다. 모멸은 모멸받는 이의 영혼을 팽개치지만, 팽개쳐진 영혼들이 다시 일어설 때 그 상처받은 영혼들의 손에 들려질 것이 한갓 낫뿐일까 싶다. 지금 이 땅에는 시민적 성원권을 얻지 못한 채 겨우 존재하고 있을 뿐인, 다쳐도 죽어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철탑과 굴뚝 위에 올라가도 좀처럼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사는 게 모멸인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김혜진의 <9번의 일>에서 노동자로 살아온 평생의 삶이 부정되는 것을 거부하며 끝까지 모멸을 견디던 그 주인공 노동자는 더 이상 빼앗길 것이 없는 마지막 단계에 이르자 마침내 자기 노동의 힘으로, 자기가 세운 철탑을 붕괴시키는 길을 선택한다. 그것이 단지 소설 속의 이야기일 뿐일까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김명인ㅣ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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