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KBS 수신료 인상과 제갈량의 북벌 실패
KBS가 현행 월 2500원의 수신료를 3840원으로 인상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지난 2007년 이후 벌써 4번째 시도다. 그동안 공영방송사의 역할을 제대로 했다면 이처럼 수신료 인상 도전이 번번이 실패했을까. 역사적으로 5번의 시도 끝에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던 제갈량의 북벌을 떠오르게 한다.
현재 KBS 수신료 인상 여론은 어느 때보다 좋지 못하다. 지난해 영국 옥스퍼드대 부설 로이터 저널리즘연구소가 조사·발표한 ‘디지털 뉴스 리포트 2020’ 보고서에 따르면 KBS는 신뢰도 비율이 50%에 불과해 전 세계 공영방송 중 꼴찌 수준을 기록했다.
특히 KBS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전 국민이 고통을 겪고 있는 와중에 수신료 인상을 추진하고 있다. 자신들 뒤에는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이 이끄는 방통위와 어느 정도 명분만 조성되면 큰 고민 없이 법안을 통과시켜 줄 여당이 있다는 양승동 사장의 계산이 있어서인 것으로 보인다.
KBS는 수신료 인상을 해야 하는 이유로 해외 사례를 들고 있다. 특히 해외 대표 공영방송사인 영국 BBC와 일본 NHK다. 이 방송사들은 KBS보다 전체 재원에서 수신료 비중이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BBC의 경우 영국 존슨 내각에서 아예 수신료를 폐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오는 2027년 면허 갱신 때까지 수신료 폐지 문제를 완전히 결정지을 예정이다. 수신료 체납을 형사 처벌하는 현행 수신료 제도부터 먼저 개편한다. 이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BBC는 수신료 비중을 낮추고, 콘텐츠 기업으로 변신을 시도 중이다. 지난해 하반기 부임한 팀 데이비 BBC 사장은 ▲뉴스에서의 중립성 수호 ▲독특하고 파급력 있는 콘텐츠 제작 ▲온라인 자원 활용 극대화 ▲상업적 수익 확대 등 네 가지 BBC 현대화 전략과제를 설정, BBC 스튜디오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NHK는 수신료 인하 압박을 받고 있다. 최근 NHK는 2021~2023년 경영계획을 발표하면서 수신료를 약 10% 인하하기로 했다. 앞서 NHK는 2012년과 지난해에도 수신료를 7%, 2.5% 각각 내린 바 있다.
이런 추세에서도 KBS가 강조하는 명분은 다른 국가의 공영방송사와 달리 재원 중 수신료 비중이 절반에 못 미치고, 2500원이란 수신료가 수십 년간 동결됐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KBS 적자가 지속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KBS에 따르면 올해부터 2025년까지 5년 동안 누적 적자 예상액은 3679억원에 달한다. 하지만 수신료보다 더 중요한 적자의 원인은 경쟁력 없는 콘텐츠와 비대한 조직의 방만 경영이다. 김웅 국민의힘 의원이 KBS 직원 중 1억원 이상 연봉자가 60% 이상이라고 주장하자, KBS가 "억대 연봉자는 46.4%(2020년 기준)"라고 해명하면서 오히려 네티즌들의 공분을 사며 역풍을 맞았다.
수신료 인상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부족한 상황에서 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지난달 31일에는 KBS 구성원이 소셜미디어(SNS) 블라인드에 "KBS에 불만들이 많은데 능력 되시면 KBS 오세요"라는 조롱 섞인 글을 게시하며 논란이 거세지자 KBS는 다음날 "대단히 유감스럽고 송구한 마음"이라고 사과했다.
또 수신료 인상안을 위한 목적으로 평양지국 개설과 북한 관련 취재 시스템 강화 등에 예산을 책정한 데 대해 논란이 일자 "공영방송으로서의 공적 책무"라고 해명하면서 여론이 더 악화됐다.
KBS를 포함한 지상파는 오는 5월, 늦으면 6월부터는 종편이나 케이블 등 유료방송과 마찬가지로 상업적 성격이 뚜렷한 중간광고도 법적으로 가능해져 수신료 인상 명분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KBS가 수신료 인상 대국민 여론을 수렴한다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국민이 찬성할지 의문이다. KBS가 국내에서 BBC 수준의 위상과 공정성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수신료 인상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국민 눈에는 KBS가 억대 연봉자들의 고액연봉을 국민 세금으로 채우려 하는 것으로 비칠 뿐이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앞서 이야기한 제갈량의 북벌 정책은 굉장한 무리수로 국력만 낭비해 촉나라의 멸망을 앞당겼다는 게 사학계의 정설이다. 넷플릭스, 디즈니 등이 참전하는 치열한 방송미디어 시장에서 조직, 콘텐츠 혁신으로 내실을 다지기보다 수신료 인상에만 매달리는 KBS의 끝이 촉나라와 똑같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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