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싸도' 사던 명품.. 이젠 '비싸서' 산다, 왜
2010년 2850달러(약 320만원), 2013년 4400달러(약 493만원), 2017년 5300달러(약 593만원), 2020년 12월 6800달러(약 761만원).
프랑스 럭셔리 브랜드 샤넬(Chanel)의 ‘클래식 미디엄백' 글로벌 평균 가격이다. 만 10년 만에 2.4배가 됐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수차례 가격 인상을 거듭한 덕분이다. 샤넬은 지난해에도 5월과 11월 두 차례 걸쳐 주요 상품의 가격을 인상했다.
서울 아파트 가격 마냥 매년 치솟는 가격에도 샤넬 매장 앞 대기 줄은 점점 더 길어진다. 인기 상품을 먼저 구매하기 위해 매장 문이 열리기도 전에 수십 명이 줄을 서 있는 모습은 흔한 풍경이 됐다. 값을 올려도 수요가 늘어나니 샤넬과 LVMH, 에르메스(Hermes) 등 주요 럭셔리 브랜드 기업의 실적과 주가는 계속 상승세다. 증권가에서 ‘미국에 테크주가 있다면 유럽엔 명품주가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아무리 가격을 올려도 명품 매장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이유는 뭘까. Mint가 시장경제의 상식을 거스르는 명품 시장의 경제 논리를 파헤쳐 봤다.
◇주식·부동산 닮아가는 명품 시장
최근 럭셔리 브랜드의 가격 인상 행렬은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샤넬에 이어 루이비통(Louis Vuitton)도 지난 1년 간 세 차례 ‘네오노에(NéoNoé) MM 핸드백의 가격을 올렸고, 설과 밸런타인데이(14일)가 있어 명품(名品) 대목으로 꼽히는 2월을 앞두고선 ‘멀티 포쉐트 악세수와’ 등 인기 제품 가격을 20~30%씩 인상하기도 했다. 구치(Gucci)와 디오르(Dior)는 지난 1년 새 주요 제품 가격을 한두 차례 10~30%씩 인상했고, 프라다(Prada)도 지난달 22일 주요 상품 가격을 평균 2~4% 올렸다. 지난해 일부 제품 가격을 인상한 에르메스도 올해 추가 인상을 검토하고 있다.
가격이 오르면 수요가 줄어드는 것이 일반적인 경제 논리다. 하지만 명품 수요는 줄기는커녕 오히려 증가세다. 한 명품 수입 업체 대표는 “지난해 주요 럭셔리 브랜드의 실적을 보면, 판매가 상승분 이상으로 실적이 개선됐다”면서 “이는 가격 상승에 더해 판매량도 증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제로 지난해 3분기 루이비통 브랜드를 소유한 LVMH의 매출은 2019년 같은 기간 대비 12% 늘었고, 에르메스의 매출도 6.9% 늘었다. 신종 코로나 사태로 인한 경기 침체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명품 시장은 더 이상 일반적인 상품 시장의 논리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명품 시장을 연구해 온 리서치회사 번스타인의 루카 솔카스 연구원은 “최근 명품 시장의 핵심 키워드는 중산층이 최고급 명품의 주요 소비자로 등장한 ‘트레이딩 업(trading up)’ 현상”이라며 “이 새로운 (중산층) 명품 소비자들은 과거와 달리 중고(리세일) 가격을 꼼꼼히 살피는 등 (명품 구매에) ‘소비’가 아닌 ‘투자’ 논리를 적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즉 명품 시장이 주식이나 부동산 같은 자산 시장처럼 굴러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유안타증권도 최근 “미술품과 고가 보석 등으로 제한됐던 ‘명품의 투자 자산화'가 명품 가방 등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명품 구매는 소비 아닌 투자”
명품 시장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주식 시장이나 부동산 시장처럼 생각하면 소비자(구매자)와 공급자(럭셔리 브랜드 기업), 명품 가격의 움직임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가격이 올라도 앞으로 더 비싸질 것으로 예상되므로 수요는 오히려 더 늘어난다. 공급자 입장에서는 가격이 계속 오를 것이란 기대가 있어야 수요가 늘어날 것이므로, 가격을 계속 올릴 수밖에 없다. 이때 공급량을 늘리면 희소성이 떨어져 가격 하락 요인이 되므로 공급량도 조절하게 된다. 부동산과 주식 시장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어쩌다 명품 시장이 자산 시장을 닮게 됐을까.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언급된다. 우선 명품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각이 달라졌다. 솔카스 연구원은 “가방, 신발 등 일부 소비재를 살 때 ‘가성비’ 좋은 제품이 아닌, 어떻게든 돈을 악착같이 모아 ‘최고 제품’을 사겠다는 심리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고 말했다.
이는 인터넷 등을 통해 쉽게 명품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면서 누구나 명품의 ‘가치’를 향유하고자 하는 잠재 소비자가 된 것과 관련이 크다. 소셜 미디어 등 이를 과시할 수 있는 수단도 흔해졌다. 지난해 말 샤넬 가방 가격이 1000만원에 육박하자 ‘차라리 돈을 더 모아 비슷한 가격의 에르메스 가방을 사겠다는 반응이 쏟아지고, 코치 등 매스티지(대중적 고급품) 시장이 몰락한 것은 대중의 이러한 인식 변화를 반영한다는 게 업계의 해석이다.
또 다른 원인은 중고 명품 시장의 성장이다. 중고 시장은 보유한 명품을 손쉽게 현금화할 수 있도록 해주는 수단이다. 주식과 부동산 시장처럼, 구매자들이 나중에 되팔 수 있는 ‘유동성’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높은 수요에 힘입어 중고 가격이 쉽게 떨어지지 않고, 일부 품목은 상승하는 현상까지 보이면서 명품 구매를 투자시하는 경향은 더욱 강화됐다. 온라인 중고품 거래 플랫폼을 운영하는 번개장터에 따르면 샤넬 클래식 플랩백, 롤렉스 서브마리너, 에르메스 버킨백, 롤렉스 데이토나 등 판매 가격이 자주 오르는 제품의 중고가는 신품 가격의 90% 이상 값에 형성되고 있다. 이 회사 곽호영 패션·라이프스타일 팀장은 “매년 가격이 10% 안팎으로 오르니, 제품의 가치가 잘 떨어지지 않고 방어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회계·컨설팅업체 딜로이트도 비슷한 분석을 내놨다. 이 회사는 지난해 말 ‘글로벌 명품 산업 2020′ 보고서를 통해 “가치가 유지되는 명품의 특징이 2차 리세일(resale·중고 재판매) 시장의 구매자들에게 매력적 요소로 작용했다”며 “리세일 시장의 성장이 (명품의) 구매 수요를 촉진시켰다”고 분석했다.
◇급성장하는 중고 명품 거래
명품 구매자들을 ‘투자자'로 만들어주는 중고 명품 시장의 성장세는 무서울 정도다. 딜로이트는 2018년 162억달러였던 럭셔리 브랜드의 2차(중고) 시장이 연평균 15.5%씩 성장해 2026년엔 685억달러 규모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 온라인 중고 명품 거래 플랫폼인 더리얼리얼의 총 거래액(GMV)은 2017년 4억9220만달러에서 2019년 10억달러를 넘기며 2년 만에 두 배로 늘었다. 국내 중고 명품 시장도 2012년 1조원 규모에서 2019년 말 기준 7조원대로 급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온라인 중고 거래 서비스가 활성화한 것이 큰 역할을 했다.
자산 시장의 특징인 투기적 현상마저 나타난다. 재판매를 통해 투자 수익을 노리는 이른바 ‘리셀러(reseller)’의 등장이다. 보통 인기 있는 제품을 미리 쟁여 뒀다가 판매가에 10~20%의 마진을 얹어 되판다. 에르메스 등 구하기 힘든 일부 제품은 3배의 가격에도 되팔고 있다. 온라인 중고 명품 업체를 운영하는 리셀러 정모(39)씨는 “주식 시세와 부동산 물건을 알아보듯, 주요 백화점 명품관을 하루에도 서너 차례 방문해 인기 제품의 입고 여부를 확인한다”며 “샤넬백과 롤렉스 등은 예물 등 수요처가 많아 무조건 우선순위로 확보한다”고 말했다.
중고 명품 생태계는 점점 확대하고 있다. 전 세계의 희귀 명품을 사고팔 수 있는 ‘스탁엑스', 주요 명품 150만개의 전 세계 판매가를 확인해 알려주는 ‘트렌비' 등은 명품에 관심이 많은 국내외 소비자들에게 인기 서비스로 자리 잡았다. 특히 2015년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창업한 스탁엑스는 희귀 운동화로 시작해 명품까지 품목을 넓힌 재판매 전문 서비스로, 주식 거래처럼 사고파는 사람들이 매도가와 매수가를 제시하고, 가격이 서로 맞아떨어지면 거래가 이뤄지는 시스템을 갖췄다. 자산 시장을 닮아가는 명품 시장의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다. 2019년 말 10억달러(약 1조1200억원)로 평가됐던 스탁엑스의 기업 가치는 지난해 말 28억달러(약 3조1000억원)으로 1년 새 2.8배나 늘었고, 올해 기업 상장(IPO)도 검토하고 있다.
◇ “추가 가격 인상 여지 충분”
명품의 가격 인상 행진은 계속될까. 일단 시장 환경은 우호적이다. 명품 시장은 실물 경기 침체와 상관없이 호황을 맞고 있다. 경매업체 크리스티의 캐럴라인 어빈 온라인 판매 담당은 “지난해 11~12월 고가품 온라인 특별 판매에서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배 이상 뛰었다”며 “폭발적 시장 반응에 힘입어 매출이 1200만 달러에 달할 전망”이라고 말했다.
세계 각국의 경기 부양 정책으로 주식·부동산 가격이 급등, 중산·부유층의 구매력이 높아진 영향이 컸다. 실제로 지난해 3분기 한국의 소득 상위 20%의 평균 소득은 전년 대비 2.9% 늘었다. 미국의 경우 실업수당(4990억달러), 재난지원금(2760억달러) 등이 임금 감소분(430억달러)을 훨씬 웃돈다는 분석도 나온다. 투자은행 UBS의 주자나 퍼즈 연구원은 “중국 등 아시아 시장과 프랑스 현지 가격의 격차가 최근 좁혀진 추세를 감안해도 아직 가격 인상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탄탄한 수요를 바탕으로 중고 명품 가격도 계속 높게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주요 럭셔리 브랜드 입장에서는 가격 인상 요인이 더 많은 셈이다. 이들은 장기적으로 제품 가격을 높게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소비자를 개발하는 데 적극적이다. LVMH는 고객층을 넓히기 위해 립스틱, 필기구 등 100만원 미만의 제품을 내놓고, 에르메스는 지난해 초 67달러(약 7만5000원)짜리 립스틱을 출시했다. K팝 걸그룹 블랙핑크의 제니와 지수를 자사 제품 모델로 쓴 럭셔리 브랜드도 있다. 소비력이 부족한 젊은 세대까지 명품 소비자로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이다.
온라인 채널과 인스타그램, 오프라인 카페 등 판매 채널을 다양화하는 노력도 한다. 과거의 신비화 전략에서 벗어나, 디자이너가 인스타그램에 직접 디자인 철학과 배경에 대한 글을 남기며 젊은 잠재 소비자들에게 호소한다. 구치 브랜드를 보유한 커링그룹과 명품 시계 카르티에와 파텍 필립 브랜드를 보유한 리시몽그룹은 지난달 전 세계 190국에 온라인으로 명품을 판매하는 ‘파페치’에 투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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