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통·번역에 외국음악가 일정 수행까지..부당업무 5년 시달린 합창단원 산재 인정
[경향신문]
합창단 상임지휘자에게서 통·번역이나 외부 동아리 활동 등 업무 범위에서 벗어난 일을 지속적으로 지시받아 스트레스로 적응장애를 얻은 합창단원이 산업재해를 인정받았다.
4일 경향신문 취재 결과 근로복지공단 안산지사는 경기 안산시립합창단 단원 A씨가 지난해 11월 “상급자들로 인해 본업 이외의 업무·활동을 하면서 정신적 스트레스가 누적됐다”며 낸 산재 신청에 대해 지난달 13일 ‘적응장애’를 승인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상급자와의 관계에서 부당한 업무 부담과 이로 인한 갈등 등이 심리적 압박으로 작용해 상병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된다는 것이 위원들의 공통된 의견”이라며 A씨에게 약 1년 간의 요양급여를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A씨는 지난 2015년 안산시립합창단에 들어온 뒤 사제지간인 합창단 상임지휘자 B씨로부터 가사 번역, 공연 프로그램북 제작 등 서류 작업, 외국인 지휘자 통역 등 업무상 적정범위를 벗어난 일을 약 5년간 지속적으로 요구받았다. 외국인 지휘자 초청 기간 동안 퇴근 후 식사 등 일정 동행을 요구받기도 했다. A씨 측은 본인 외에도 많은 단원이 업무 외 일을 수행했고 그 과정에서 정당한 보수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합창단 단원들은 올해 1월 이전까지 근로계약서도 쓰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B씨는 A씨에게 자신이 속한 외부 동아리의 해외 일정까지 따라오도록 요구했다. A씨는 동아리 활동으로 본업인 시립합창단 활동에 차질이 생겼다고 했다. 노조 측에 따르면 지난 2019년 10월 A씨가 동아리를 그만두겠다고 하자 B씨는 “2년 동안 너(A씨)가 동아리에서 영어도 잘하고 총무일도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 나는 그거 때문에 너가 입사할 때 서른이 넘었는데도 뽑았다”고 말했다. (관련기사▶[단독]"서른인데 이거 잘해서 뽑았다"…통역에 서류작업까지 한 합창단원) A씨는 공황장애와 우울증이 생겨 한때 공연 연습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A씨는 병가를 내고 지난 2019년 12월 B씨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안산시에 신고했다. 같은 해 7월 시행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개정 근로기준법)은 사용자나 노동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우위를 이용해 다른 노동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는 행위를 금지한다. 하지만 안산시는 조사 2개월 만인 지난해 2월 A씨의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기각했다. 안산시는 조사 결정문에서 “합창단 내 업무범위가 명확히 규정되지 않고 행정직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미국 교수 방문·공연에 대한 수행, 통역 등 행정·보조 업무를 수행한 것으로 인정된다”면서도 “통·번역 업무를 수행할 직원이 부족한 점, 항상 업무가 과도하지는 않았던 점, 특별한 행사가 있을 경우 진행하는 업무였던 점” 등을 기각 이유로 들었다.(관련기사▶안산시, '합창단원에 직장내 괴롭힘' 진정 기각 결정)
A씨의 입단 당시 업무가 명시된 근로계약서는 없었지만, 안산시의 ‘안산시 예술단원 복무규정 별표’를 보면 예술단원의 업무는 “매 공연시 연습 및 연주활동에 전념”과 “악기, 악보, 소품, 의상 등 관리”라고 적혀 있다. 안산시 관계자는 “공연에 따르는 여러 제반 업무가 있는데, 해야 할 일과 관리자와 단원들 사이 인식 차이가 있었던 걸로 보인다”며 “(A씨가 주장한) 해외 연주자 관련 연장근로에 대해 시에서도 알지 못했다. 앞으로 예술단이 요청할 경우 통역·안무·운반 등 다른 업무에 필요한 인력을 투입하기 위해 절차에 착수한 상태”라고 했다.
시의 결정과 달리 근로복지공단은 A씨가 부당한 업무로 상병을 얻었다고 인정했다. 호영진 법무법인 여는 노무사는 “지휘자는 합창단 내에서 절대적 권한을 행사하는 사람이라 근로조건 전반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이 컸다. 그 지시를 함부로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라며 “(이번 산재 인정은)안산시가 직장 내 괴롭힘을 불승인했음에도 근로복지공단이 ‘B씨의 부당한 업무지시가 상병과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었다’고 인정한 사례로서 의미가 있다”고 했다. 안산시 관계자는 “직장 내 괴롭힘 기각 결과를 재논의하는 것까지는 아직 고려하지 않았다”며 “만약 필요하다면 노무사 등에게 자문을 구할 예정”라고 말했다.
한편 B씨는 사임을 앞둔 지난해 3월 초 “(A씨가 동아리를 그만둔다 했을 때) 화를 내면 혹시라도 A씨가 마음을 돌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심한 말을 한 것을 사과한다. 조속한 쾌유를 기원한다”며 “지휘자가 음악을 고르고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단원들을 힘들게 하는 일이 있을 수 있고, 목소리도 크게 내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때마다 지휘자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합창단과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 수는 없을 것 같다”고 입장을 밝혔다.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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