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생활 하수'도 잘만 처리하면 '에너지물' 된다
[서울&] [서울 쏙 과학] 전국 최대 ‘하수열 이용 열 공급 시설’인
탄천이앤이 방문, 겨울 속 후끈함 느껴
밖은 길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지만
하수열 뽑는 곳, 코트 벗을 정도로 따뜻
‘히트펌프’ 냉매로 수소불화탄소 사용해
‘기화-액화 원리’ 이용하는 것이 핵심
하수는 히트펌프에 5도의 온기 건내고
히트펌프는 난방수를 15도 높여 보내
독일·일본 등 발빠른 활용 나서는데
한국은 석유값 내리자 ‘답보’ 아쉬움
하굣길에 아홉 살 난 딸이 맨홀 뚜껑을 보고 물었다. “엄마, ‘우수’가 뭐야?” 빗물(雨水)이라고 답했다. 며칠 뒤 딸이 다른 맨홀 뚜껑을 보고 또 물었다. “여긴 왜 ‘오수’야?” 변기에 ‘응가’한 물, 옷 세탁한 물, 공장에서 쓰고 더러워진 물(오수·汚水)을 깨끗하게 만들려고 물재생센터로 보내는 길이라고 설명하다가 잘난 척 한마디 덧붙였다.
“서울의 물재생센터에선 오수에서 에너지를 뽑아내 집을 따뜻하게 덥히기도 한대.”
“에너지를? 어떻게?”
아뿔싸. 거기까진 몰랐다. 그래서 물어봤다. 전국에서 가장 큰 ‘하수열 이용 열 공급 시설’을 갖춘 탄천이앤이로 가서. 탄천이앤이는 포스코에너지가 2012년 설립한 회사로 탄천물재생센터에서 처리한 뒤 방류되는 하수에서 열에너지를 회수해 지역난방사업자에게 판매하고 있다.
전날 내린 눈이 그대로 길에 얼어붙었을 정도로 추운 날이었다. 하지만 하수열을 뽑아내는 지하 공간은 코트를 벗어도 될 정도로 따뜻했다. 초록 관으로 흘러든 12도 온도의 하수는 까만 원형의 히트펌프(Heat Pump) 속에서 5도의 온기를 준 뒤 파란 관을 타고 한강으로 나갔다. 반면 난방수는 은빛 관을 통해 히트펌프로 흘러들어 압축기에서 추가된 열까지 15도의 열을 얻어 되돌아 나갔다.
원리를 묻자 함승균 탄천이앤이 소장은 사무실로 데리고 간 뒤 영어와 숫자가 잔뜩 적힌 ‘흐름도’(Flow)를 보여줬다. 그의 전문가다운 설명을 내가 영 못 알아듣는 눈치였는지 운영시스템 앞에 앉아 있던 박범준 과장이 끼어들었다.
“기화, 액화 원리 아시죠?”
물론 안다.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도 나온다. 기화는 액체가 열에너지를 빼앗아 기체가 되는 현상이다. 더운 여름날 도로에 물을 뿌리면 시원해지는 현상이다. 액화는 반대다. 기체가 액체로 바뀌며 열에너지를 내준다. 에스키모들은 그래서 얼음집 안에서 벽에 물을 뿌린다. 물이 얼면서 열을 뿜으니까.
박 과장이 설명을 이어갔다.
“히트펌프는 기화를 일으켜 하수에서 열을 빼앗고 액화를 일으켜 난방수에 열을 줍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렇다. 하수에서 쉽게 열을 뺏기 위해 히트펌프는 냉매로 수소불화탄소(HFC-134a)를 쓴다. 이 액체는 영하 26.18도에서도 끓어오를 정도로 비등점이 낮기에, 미지근한 하수에서도 열을 얻어 11도짜리 기체가 된다. 이것을 전기로 압축하면 온도가 72도까지 높아진다. 이걸로 가정에서 쓰일 난방수를 덥힌다.
이런 식으로 탄천이앤이는 2020년만 해도 석유로 환산하면 5372t(TOE)에 해당하는 열에너지를 생산했다.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은 덕분에, 이산화탄소로 치면 1만2547t에 달하는 온실가스를 줄였다. 소나무 9만여 그루를 심은 효과다.
전국 어디서든 언제든 이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여름엔 공기보다 차갑고 겨울엔 따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4만4천 가구에 활용할 정도로 규모 있는 하수열 재활용 설비를 갖춘 지역은 서울뿐이다.
중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간단한 과학원리로 이렇게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는데, 왜 우리 동네에선 못하는 걸까? 거기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열을 빼내는 설비를 갖추는 데에 큰 투자가 필요하다. 그런데 한국에선 하수열이 법적으로 재생에너지로 인정되지 않는데다 기대수익이 낮아 투자자가 나서지 않는다.
한국에선 하수 처리수가 한강으로 나가야만 재생에너지 지위를 얻는다. 한국 법에선 하천수여야 재생에너지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서울시는 신·재생에너지 시설 지침에 하수열을 대체에너지로 지정해 활용을 장려한다. 수익구조가 나오게 지원한다.
탄천이앤이 설립이 한 예다. 포스코에너지가 설립비 354억원을 투자했고, 한국지역난방공사가 15년 동안 난방열을 구매해 투자금 회수를 돕는다. 하수와 부지를 제공한 서울시는 2029년에 시설을 기부받는다.
이 아름다운 그림은 2017년 서남그린에너지와 서울에너지공사가 참여한 ‘서남 하수열 이용 지역난방 공급시설’을 끝으로 더 나오지 않고 있다. 유가가 떨어지면서 하수열 에너지 생산비가 석유나 가스값보다 높아지자 투자 수익성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길이 없다면 만들어야 한다. 독일·스위스 등 기후위기에 적극 대응하는 나라들에선 하수열 이용을 장려한다. 특히 일본은 2012년 ‘도시의 저탄소화 촉진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민간사업자가 하수열을 쓸 수 있게 길을 터줬다. 오사카에선 낡은 하수관을 ‘열 회수 관’으로 바꿔 지역에서 바로 열을 쓴다. 나고야에서는 시내에 있는 ‘사사시마 라이브 24 지구’의 냉난방에 하수열을 쓴다.
하수열 회수 기술을 연구한 박상우 저탄소자원순환연구소장은 “어차피 가야 할 길”이라고 표현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선언한 ‘2050년 탄소중립(넷제로)’ 달성을 위해서는 더 다양한 재생에너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에서 더럽혀진 물이 우리 동네를 덥히는 물로 대우받는 날이 온다면, 맨홀 뚜껑에 적힌 말도 바뀔까? ‘오수’ 대신 ‘에너지물’로.
글·사진 이경숙 과학스토리텔러
참고 자료: 서울특별시 신·재생에너지 시설의 에너지 생산량 산정 지침, 하수열 온도 차 에너지 회수 기술 동향(국가환경정보센터, 2016-056호) 자문: 함승균 탄천이앤이 운영 소장, 박상우 저탄소자원순환연구소 소장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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