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편집인의 눈] 좋은 저널리즘과 풀꽃 / 김민정
[시민편집인의 눈]
그는 대규모 재개발을 앞둔 서울 방배동 다세대주택에서 살던 모자의 비극을 세상에 알렸다. 그는 현장에 있었고, 모두가 무심코 지나치던 발달장애 노숙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고, 신뢰감을 형성하기 위해 한 달 동안 찾아가서 대화를 나눴다. 자신의 일이 뭔지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어서 가능한 일 아니었을까?
김민정 | 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플루트가 하나 있다. 세 아이 모두 갖고 싶어 한다. 가난한 아이, 플루트를 잘 부는 아이, 플루트를 만든 아이. 누가 가져야 정의로운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잘 부는 아이가 가져야 한다고 했다. 플루트는 악기고, 악기의 텔로스(Telos: 목적, 목표, 본질)는 뛰어난 음악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르티아 센은 하나로 답하기 어렵다고 했다. 가난해서 플루트를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아이가 가장 필요로 할 수도 있고, 플루트를 애써 공들여 만든 아이가 갖는 것이 마땅할 수도 있다는 거다. 김도균은 그래서 첫째, 텔로스가 무엇인지, 둘째, 각 상황에 가장 적합한 정의의 원칙이 무엇인지 따져봐야 한다고 했다.(<한국 사회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결국 우리는 모든 상황에 통용되는 하나의 정답은 없다는 걸 마음에 새기고 함께 고민하고 이야기해봐야 한다.
<한겨레>가 있다. 한겨레 보도가 정부 편향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 보수신문과 다를 바 없다고 화를 내는 사람, 사실관계는 정확하지만 진실과는 거리가 먼 보도를 경계해야 한다는 사람, 좌우로만 보지 말고 위아래로 보고 ‘특별히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목소리들’을 들려줘야 한다는 사람. 한겨레는 어떤 저널리즘을 추구해야 할까?
한겨레 창간사에 나타난 한겨레의 텔로스는 “진실로 국민대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참된 신문”이다. 한마디로 좋은 저널리즘이다. 좋은 저널리즘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정치의 텔로스, 즉 좋은 삶을 실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우리는 저널리즘을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된다.
좋은 저널리즘은 어떻게 구현되는가? ‘객관적 저널리즘’은 한때 좋은 저널리즘의 대명사였고 여전히 전문직주의의 규범으로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객관적 저널리즘은 불가능하다’는 관점이 제기된 지도 이미 오래다. 언론이 ‘제대로 된 객관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 사람 이야기도 받아쓰고 저 사람 이야기도 받아쓰는 게 객관성이 아니라는 거다. 객관성은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이고 구체적으로는 ‘원래의 관점에서 한발 물러나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파악하고 이해한 후, 자신과 세상 그리고 자신과 세상의 상호작용에 대해 인식하는 방법’을 말한다는 거다. 기자의 취재를 사회과학자의 탐구방식과 유사하게 보는 입장인데, 객관성 대신 포괄적 보도라 불러도 된다. 한편, 사람들이 신문을 읽는 건 정보를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의례(ritual)라는 시각도 있다. 저널리즘이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되고 문제를 해결하거나 사회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행동주의 저널리즘도 떠오른다.
답을 내기 어려우니 청개구리처럼 질문을 더 해본다. 세계 최초로 국민모금으로 만들어졌고 7만여 국민주주가 70%의 주식을 가진 한겨레는 여타의 언론과는 다른 저널리즘을 추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국민주주 신문이라는 물리적 토대는 좋은 저널리즘을 추구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갖췄다는 것, 즉 사주의 이익이나 정치권의 압력(예: 공영방송 지배구조)에서 자유롭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일까? 유일한 진보언론으로 엄혹했던 시절을 밝히는 독보적 존재가치를 가졌던 1988년의 한겨레가 다수의 진보매체들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2021년에 서야 할 자리는 어디일까? 게다가 포털과 에스엔에스를 통해 뉴스를 접하는 방식이 주류가 된 지 오래고 사람들은 검증된 사실보다 허위정보와 정치선동에 더 열광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겨레가 좋은 보도를 해도 널리 읽히거나 보상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건데 이런 현실은 어떻게 헤엄쳐 나갈 것인가?
지금 한겨레가 추구해야 할 좋은 저널리즘이 뭔지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한 사람이 떠오르긴 한다. 사회복지사 정미경씨다. 그는 대규모 재개발을 앞둔 서울 방배동 다세대주택에서 살던 모자의 비극을 세상에 알렸다. 그는 현장에 있었고, 모두가 무심코 지나치던 발달장애 노숙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고, 신뢰감을 형성하기 위해 한 달 동안 찾아가서 대화를 나눴다. 자신의 일이 뭔지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어서 가능한 일 아니었을까?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시인의 말처럼 한겨레의 저널리즘이 그랬으면 좋겠다. 시의 제목은 ‘풀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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