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박스 대란, 대형업체의 독식 탓" 불만에 결국 공정위 등 개입

정민하 기자 2021. 2. 4.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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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박스원자재 수급의 어려움으로 부득이하게 박스제품의 품절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제지사에서 원지가 들어오는 대로 부족한 제품을 생산하는 중이나, 재고가 정확하게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종이박스를 전문으로 판매하는 한 업체는 최근 이같은 내용이 적힌 공지문을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렸다. 지난해 10월 국내 원지 생산량의 7%를 담당하는 대양제지 공장 화재 이후 골판지 원지 수급이 어려워진 데다가 코로나19 장기화로 택배 물량까지 급증하면서 이를 이용해 만드는 종이박스 품귀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마다 종이박스를 주문해 배송하는 영세업체들도 비상이 걸렸다.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는 A씨는 "간신히 종이박스를 주문했지만, 받아보기까지 한 달 정도가 걸린다더라"면서 "급한 대로 비닐 포장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 중"이라고 했다.

종이박스 판매 업체들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라온 공지글. /홈페이지 캡처

택배 박스 수요가 급증하는 설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골판지 원지 공급난이 지속되고 있다. 제지업계는 ‘종이박스 대란’의 원인을 놓고 갈등을 빚고 있다. 중소형 골판지 전문업체들은 대형 업체가 자사 계열사에 원지 공급을 집중하면서 공급이 부족해졌다고 주장한다. 반면 대형 업체는 박스 수급에 불안감을 느낀 수요기업들의 중복발주로 주문량이 몰렸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박스의 원자재인 골판지 원지 부족 상황이 계속되자 국무총리실 주재로 산업통상자원부, 공정거래위원회, 중소벤처기업부를 비롯한 제지연합회, 골판지조합, 박스조합 등은 4일 세종에서 회의를 열 예정이다. 정부는 최근 ‘종이박스 대란’ 대책 마련을 위해 관련 업계와 매주 회의를 개최해왔지만, 산업부 이외의 기관과 제지업계가 총 소집된 회의는 이번이 처음이다.

골판지 박스 제조 공장으로 입고되는 골판지 원지가 트럭에 실려 있다. /한국골판지포장산업협동조합 제공

이날 회의에서 다뤄질 핵심 쟁점은 골판지 원지의 ‘쏠림 현상’이다. 종이박스는 1차 원료인 골판지 원지를 2차 원료인 원단으로 가공한 후 이를 이용해 만들어진다. ‘원지→원단→박스’ 등 3단계 공정 과정을 수직화된 계열사를 통해 한 번에 진행하는 곳이 ‘일관업계’로, 국내 박스 생산의 약 70%를 차지한다. 이와 달리 별개의 원지 생산업체로부터 원지를 공급받아 골판지나 골판지상자 등을 생산하는 전문 골판지포장기업들은 대부분 중소형 업체다.

중소 골판지 전문업체들은 대형 골판지 업체들이 원지 부족 상황을 부채질한다고 주장한다. 원지가 부족해지자 계열사인 원단과 박스업체에만 원지를 공급하고, 계열사가 아닌 전문업체에는 물량을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다.

골판지 전문업체가 중심이 된 한국골판지포장산업협동조합은 지난달 28일 ‘골판지파동 극복을 위한 상생협력 재촉구’라는 공문에서 "상당수 골판지 원지기업이 외부공급을 제한한 채 자사 계열사 위주의 공급을 하고 있으며 이는 심각한 거래상 지위남용"이라고 지적했다. 일관업계에서 ‘제 식구 챙기기’를 통해 공급을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골판지업체 공장에서 관리자가 골판지를 운반하고 있는 모습. /조선DB

그러나 일관업계는 "안정적인 원지 수급이 필수적인 대기업과의 거래 특성상 통상적으로 해오던 방식일 뿐, 대양제지 화재 이후 계열사 위주의 원지 공급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골판지 원지 부족 사태는 지난해 10월 연간 원지 생산량의 7%를 담당하는 대양제지 안산공장에서 발생한 화재 사고로 촉발됐는데, 사고 전후 일관기업의 계열사 골판지 원지 공급 비중은 평균 약 65%를 유지해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종이박스 부족 불안 심리에 의한 가수요’를 골판지 원지 부족의 원인으로 꼽았다. 제지업계 관계자는 "원지 부족 사태에 대응해 생산설비를 완전 가동하고, 수출물량을 내수로 돌리는 등 원지 공급여건을 대폭 개선했다"면서도 "하지만 물량 부족을 우려한 박스 회사들이 원지를 더 많이 구입하고, 유통 대기업들이 박스를 대량 선주문하는 등 불안 심리로 가수요가 붙으면서 박스 대란이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정부는 업계 간 자율 조정을 기다리고 있지만, 부족 사태의 원인 진단에선 전문업계의 손을 들어주는 모양새다. 업계 내부적으로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면 공정위나 중기부에 이첩해 실태조사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한 제지업계 관계자는 "기존 산업부 소관으로 진행되던 회의에 공정위와 중기부가 참여한 것을 보면 골판지 원지 사태를 불공정거래 문제로까지 보고 있다는 일종의 시그널을 줬다고 생각한다"면서 "양측이 간격 차를 좁히지 못할 경우 정부가 결국 문제 해결을 위해 직접 나설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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