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이 안녕'하면 '개인의 권리'는 묻혀도 되는가 [흑백 민주주의 ⑥]
[경향신문]
■잠시, ‘방역’이 있겠습니다…‘공정’은 잠깐 넣어두세요
2020년 코로나19는 한국 사회의 많은 부분을 바꿔 놓았다.
자영업자들의 수입이 줄고 문을 닫는 가게들 또한 늘어났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확진자의 개인정보와 동선을 공개한 데 이어 시민들의 개인정보를 수집했다. 전염병 확산이 생태·기후변화에서 비롯됐다는 인식이 생겼고, 정부와 기업들의 기후위기 대응도 구체화됐다. 산업구조 변화도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일련의 변화는 논란을 낳았다. 방역 때문에 입는 피해가 대기업보다 소상공인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오면서, 수도권 소상공인들은 지난 2일 방역당국이 내건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 2.5단계 영업제한 시간인 오후 9시 이후에도 영업을 이어가는 ‘오픈 시위’에 나섰다. 더 급진적인 탄소중립을 주장하는 환경운동단체와 탄소배출 산업의 일자리를 지키려는 노동운동단체가 기자회견장에서 충돌하기도 했다.
한국 사회는 방역을 우선순위에 두면서 문제에 대해 충분한 논의를 하지 못했다. 양극단의 목소리, 정치적 이슈가 될 수 있는 사안만이 과도하게 논의되는 ‘흑백 민주주의’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박이대승 불평등과시민성연구소 소장은 “군사적 위협에 대응한다며 주민들을 내쫓고, 경영상의 긴급한 필요 때문에 노동자를 대량 해고하는 등 한국 사회 어딜 가나 ‘위기 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는 논리가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한다”고 지적했다.
이지언 환경운동연합 활동가는 “전례 없던 위기에서 급한 불을 끄는 식으로 방역이 진행됐다”며 “장기적으로 개인의 권리와 방역을 어떻게 조화시킬지, 탄소중립 시대에서 환경·노동운동이 어떻게 협력할 수 있을지 논의의 장이 늘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2021년 한국 사회는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앞두고 있다. 경향신문은 한국 사회가 사회갈등이 증폭되는 ‘흑백 민주주의’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들을 던져보기로 했다.
지난해 말, 스페인 정부는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거부한 사람들 명단을 작성해 유럽연합(EU)과 공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수집된 개인정보를 비공개할 것이라 했지만, 개인정보가 수집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악용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컸다. 프랑스 정부는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하지 않은 사람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의 법을 만들려다 반발이 계속되자 취소했다. 코로나19 백신 접종 속도가 빠르다는 이스라엘은 백신을 대거 공급한 다국적 제약회사 화이자에 코로나19 관련 데이터를 넘겨주기로 했다. 코로나19 백신의 원활한 접종을 위해 백신 거부자들에게 불이익을 주고 개인정보를 수집·처리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이 서구에서 논란이 된 것이다.
지난달 유명순 서울대 교수팀이 한국의 성인 109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국민인식 조사에서 ‘절대 백신을 접종하지 않겠다’고 답한 응답자는 1.8%에 그쳤다. 그러나 백신 접종시기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67.7%는 ‘어느 정도 지켜보다 맞겠다’고 답했다. 한국에서도 백신 부작용과 백신 거부 움직임이 생기면 서구에서와 같은 논란이 일 수 있다.
■공공의 안녕 vs 개인의 권리
방역 개인정보 처리 두고 논란
한국도 확진자 동선 공개 ‘와글’
정부 “정보수집 불가피” 논리
공공의 안녕을 위해 정부가 개인의 권리를 어디까지 제한하고, 개인정보를 수집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지난해 국내에서도 논쟁거리였다. 지난해 2월 ‘신천지 관련 확산’ 전후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코로나19 확진자의 동선을 공개했다.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확산 당시 방역당국의 감염경로를 알 수 없는 동선 공개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취지에서 시행됐지만, 공개하는 개인정보량이 과도하다는 지적도 많았다. 지난해 10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서 확진자의 성별·나이·국적·거주지 등 상세정보를 공개하지 말라는 권고안이 나온 뒤에야 개선됐다.
지난해 5월 ‘이태원 클럽 관련 확산’ 이후에는 정부의 개인정보 수집이 화두가 됐다. 7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은 정부와 서울시·경찰이 이태원 방문자 1만여명의 휴대전화기지국 접속정보를 수집·처리한 것이 “개인정보 자기결정권,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하는 위헌 행위”라며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집회·결사의 자유도 논쟁 무대에 올랐다. 보수단체가 개천절·한글날 집회 계획을 밝히자 서울 광화문광장을 경찰버스가 에워싸는 ‘차벽’이 다시 등장하면서였다. 헌법재판소는 2011년 차벽을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사회적 논의는 부족했다. 방역조치로 영업을 못하는 자영업자 등 생존과 직결되는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방역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는 명분이 힘을 얻었다. 정형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공의료위원장은 “집회·결사의 자유는 찬성하지만, 광복절 집회 주최자들은 방역을 위협하고 가짜뉴스를 퍼뜨리며 사회적 불안과 분란을 일으켰다”면서 “그들의 집회를 막은 것이 민주주의의 후퇴라고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남재일 경북대 교수는 “서구는 개인주의가 과잉된 측면이 있다”며 “어떻게 보면 봉건적일 수 있는 한국의 집단주의가 코로나19 방역과 잘 맞았고 장점이 됐다”고 말했다.
역학조사관들은 정부의 개인정보 수집이 불가피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이를 공표하는 데에는 부정적이었다. 유명순 교수팀은 지난해 11월 경기도 역학조사관 20명을 면접한 연구를 통해 “조사관들에게는 코로나19 확진자 접촉자 추적에 GPS, 신용카드 사용 내역 분석 등이 중요하다는 믿음이 컸다”면서도 “확진자의 동선이 사회에 알려지는 것은 실효성이 없고, 개인정보를 보호해야 할 정부와 지자체가 적극 동선 공개를 하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도 있었다”고 밝혔다. 이태원 클럽 동선 공개는 확진자가 ‘성소수자가 다니는 클럽’에서 나왔다는 점이 부각되면서 성소수자들이 역학조사에 응하지 않고 숨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예외상태’의 조건은 법으로 규정돼야
‘예외의 일상화’ 뉴노멀 우려
발동서 종료까지 법 규정 시급
안전과 기본권 조화 모색해야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 지적한 ‘예외상태의 일상화’가 코로나19 국면에서 ‘뉴노멀’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우려는 여전하다. 국가권력이 법질서의 통제를 받지 않는 ‘예외상태’가 팬데믹 이후 ‘정상적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2001년 9·11테러를 당한 미국, 2015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를 겪은 프랑스에서 예외상태는 공식적으로 발동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들 국가에서는 예외상태의 발동 조건이나 종료 시한이 법으로 규정돼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이를 상세히 규정한 법이 없다. 코로나19 확산 국면에서도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된 적은 없다.
예외상태의 일상화가 차별과 배제로 연결돼서는 안 된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박이대승 불평등과시민성연구소 소장은 “한국 사회에서는 ‘위기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는 논리가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했다. 예외상태의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한국 사회가 잘 모른다”고 말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는 “확진자들은 사회적 낙인찍기를 당한 반면 그들의 목소리는 배제됐다. 코로나19 확진이 개인 책임인 것처럼 몰아간 측면도 있다”며 “안전과 국민 기본권이 조화를 이룰 때 K방역의 성과가 의미 있다”고 말했다.
윤승민·조문희 기자 me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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