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구부터 예술, 눈길 닿는 모든 곳이 작품
눈길 주고 발길 닿는 데가 모두 역사의 흔적이다. 안국역 근처 현대 사옥에서 중앙고까지 약 1㎞ 정도 이어지는 서울 북촌 계동길이 그렇다. 조선 후기 명문가 양반촌이었고,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기에 이르는 동안에는 독립지사와 정치가, 기업가, 예술가들이 터 잡고 교류하면서 한국의 정치·경제·문화사가 만들어진 무대였다. 1970~80년대엔 퇴락했으나 90년대 <겨울연가> 등 드라마 촬영지로 주목받으면서 카페와 음식점이 곳곳에 들어서 관광객이 찾는 소비지구로 바뀌었다.
코로나 사태로 인적이 끊겼던 이 길에 최근 미술인의 눈길이 쏠리기 시작했다. 중간 지점인 84번지와 92번지에 고깃집과 목욕탕을 리모델링한 전시공간 두 곳이 지난 연말 개관하면서부터다. 공간의 역사를 살리면서도 젊은 작가들의 현대미술과 민화를 풀어놓은 두 공간은 바로 ‘뮤지엄헤드’와 ‘갤러리 조선민화’다. 청년작가 기획전 ‘나메’와 ‘디자이너의 민화’란 제목으로 개관전을 열면서 계동길을 열띤 미술 현장으로 바꿔놓고 있다.
■ 옥탑방에서 본 역사 공간의 풍경 서너 평짜리 3층 옥탑방 삼면 창문은 역사의 풍경으로 들어가는 시각적 통로다. 노란 석양빛이 스민 계동길과 주변 한옥의 지붕이 첩첩이 쌓인 풍광이 들어오고 이를 배경으로 젊은 디자이너의 생활용품 조형물이 오밀조밀한 조형미를 뽐낸다.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일가가 살았다는 근대식 저택과 인왕산도 보이고, 인촌 김성수의 집과 남산, 현대 사옥의 외관도 들어온다.
지난해 12월 고깃집 건물을 리모델링해 계동길 84번지에 문을 연 비영리 전시공간 뮤지엄헤드는 옥상에 마사토를 깔고 옥탑방을 설치한 2층짜리 벽돌 건물이다. 소장 건축가 서승모 사무소효자동 소장의 작품이다. 낡은 콘크리트 건물에 팬 느낌으로 창을 내고 거친 질감의 콘크리트 가림판을 정면에 붙인 특이한 외관이다. 발칙하고 거친 상상력을 앞세운 청년작가의 영상, 조각, 온라인 아트 작품을 대거 배치한 개관전 ‘나메’로 화제를 낳고 있다.
젊은 창작자의 작품이 주로 변두리 대안공간에서 전시되는 관행과 달리 고급스럽고 말끔한 공간에서 전위 작품을 선보인다는 운영 방침이 흥미롭다. 서승모 소장은 “추상적인 천장부와 벽체 수벽 일부만 살리고 나머지는 모두 걷어내면서 추억을 추상화한 공간을 만들었다”고 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지면 하부로부터 1.3m를 띄운 채 가림막 형식의 임시벽을 쳤다는 점. 정면의 아래쪽만 트고 나머지를 가린 임시벽의 얼개 덕분에 전면 창을 두고 안쪽에 자리한 전시공간은 폐쇄성과 개방성을 함께 가진다. 밤에 보면 빛나는 전시장에 늘어선 작품과 관객의 하체 모습만 가림벽 사이로 드러나면서 묘한 시각적 재미를 끌어낸다. 이달 말부터는 청년작가들의 조각 작업을 선보일 예정이다.
■ 옛 욕탕에서 민화들이 꿈틀거린다 남녀노소가 몸을 씻던 욕탕이 민화 속 해와 달, 동물들이 꿈틀거리고 도란거리는 비디오아트 예술탕으로 변했다. 초승달이 떠올라 보름달로 변해 물에 퐁당 하고 떨어지더니 토끼가 방아를 찧는 풍경이 펼쳐진다. 물속을 노니는 송사리가 토끼의 엉덩이를 물어뜯는 장면이 이어진다. 뮤지엄헤드 바로 위 건물인 옛 중앙탕 건물에 터 잡고 개관전을 연 갤러리 조선민화는 현관 진입부와 1층 들머리 작품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건물 모서리에 출입구를 낸 근대식 건물 특유의 얼개에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대중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그 안에 낯설고 기운 센 민중 민화가 도열하듯 들어섰다. 화면을 가득 채운 버드나무 가지와 어울린 게와 물고기, 큰 호떡처럼 꽃무늬를 턱턱 띄워 올린 화조도가 시각적 쾌감을 안긴다.
안상수 디자이너의 안그라픽스에서 디렉터로 일하다 독립해 사무소 ‘나비’를 차리고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 중인 이세영씨가 지난 10여년간 남다른 안목과 내공으로 모은 민중 민화를 추려 선보이는 ‘디자이너의 민화’전은 전시 디자인에 신경 쓰지 않아 잡동사니 모음 같은 느낌을 주는 기존 민화전과는 차별적이다. 세련된 공간 꾸밈새, 기존 목욕탕의 구조와 역사를 그대로 살린 의도가 돋보이는 공간이다. 이 대표는 “지난 수년간 민화 작가가 급증하면서 창작 작업 붐은 일었지만, 막상 주위에 민화 수작을 마음 편히 볼 수 있는 상설전시 장소는 찾기 어려웠다. 갤러리 조선민화는 낯설고 센 작품을 통해 민화 감상의 갈증을 달래주는 상설전시관이다. 다른 민화 수집가와 협력 전시, 민화 작가를 위한 기획전과 대관 전시 등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박영선 “‘비문 정치인’ 아냐…내 마음은 항상 똑같았다”
- 오토바이에 택배 더미, 위험 내몰리는 집배원
- ‘곳간 열쇠’ 앞에서 흔들리는 이낙연-홍남기의 인연
- 물 새고 흔들리고…세계에서 가장 높은 뉴욕 아파트 결함 논란
- 화이자·모더나 효능 95%…아스트라·얀센 집근처 병원서 접종
- 서울 30만호·전국 85만호…정부, 대규모 부동산 공급대책 발표
- ‘안희정 캠프 합류 후회?, 아들 입대는 출마 때문?’…박영선 답변은
- [이창섭의 MLB 와이드] 류현진의 천적, ‘김광현 특급 도우미’ 되다
- 문 대통령, 오전 8시 바이든과 첫 정상통화
- 입구부터 예술, 눈길 닿는 모든 곳이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