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의 눈물] 건강했는데 한국 와서 골병·불임.. "병원 가면 월급 절반 사라져"
농어촌서 중노동 5개국 31명 인터뷰
양식장·돼지축사·채소농장서 고된 일
"휴식 없어 방광염 걸리고 디스크까지"
"건보료 2배 내는데 아파도 병원 못 가"
베트남 이주노동자 응우옌 반 남(가명·33)씨는 2014년 3월 한국에 왔다. 7년 전 응우옌이 갓 태어난 딸과 아내를 두고 한국행을 택한 건 돈을 쉽게 벌 수 있다는 브로커의 꾐 때문이었다.
한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 머물기로 마음먹었던 기간은 10년이었다. 고용허가제(E-9)를 통해 한국에 들어온 이주노동자는 '성실근로자'로 인정 받으면 최장 9년 8개월을 일할 수 있는데, "열심히 일해서 베트남에서 가족들과 살 집을 사겠다"는 게 응우옌의 바람이었다.
응우옌이 처음 일하게 된 곳은 강원도 동해의 어선이었다. 선원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뱃사람으로 자란 응우옌은 바닷일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계약서에 적힌 월급은 140만원. 하지만 응우옌은 개의치 않았다. 일을 잘하면 사장님이 임금을 올려줄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다. 건강보험도 없었지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픈 곳 없는 27세의 건장한 청년이었으니까.
하지만 한국 어촌에서 이주노동자에게 요구하는 업무강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새벽 2시부터 오전 10시까지 조업하고, 항구에 돌아와서는 잡은 고기를 풀었다. 하루 종일 일하고 퇴근하면 오후 7시였다. 휴일이나 주말도 따로 없었다.
2년 넘게 중노동이 지속되자 응우옌 몸에선 이상 증세가 나타났다. 목과 허리에 디스크 증세가 온 것이다. 무릎과 팔에도 관절염이 생기는 등 온몸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베트남에서 온 다른 이주노동자 6명과 함께 지내는 비좁은 숙소에선 저녁마다 응우옌의 끙끙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선주(船主)에게 병원에 가게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너가 없으면 누가 일하냐"며 뺨을 맞았다. 가슴을 발로 차이기도 일쑤였다. 선주는 응우옌의 여권과 외국인등록증을 숨겨놓고 "내가 고용연장 허가 안 해주면 베트남으로 돌아가야 되는 것 알지?"라며 일을 강요했다.
2017년 2월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응우옌의 고통이 심해지자, 그제서야 사장은 병원에 다녀오라며 하루 휴식을 줬다. 택시비 5만원을 내고 도착한 읍내의 큰 병원. 각종 검사를 받고 난 뒤 받아든 진료비 계산서에는 '60만원'이 적혀 있었다. 약값까지 더하니 한 달 월급의 절반이 치료비로 들어갔다. 건강보험이 없어서였다. 물리치료는 꿈도 꾸지 못했다.
응우옌은 휴식도 없이 다음날 다시 바다로 나갔다. 몸이 망가지다 보니, 배 위에서 그물을 끌어올리는 모든 순간이 고통이었다. 버티다 못한 그는 결국 그해 10월 숙소에서 몰래 도망쳤다. '미등록체류자'가 된 것이다.
전국 각지를 헤매던 응우옌은 2017년 10월 전남의 김 양식장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하지만 3년 전부터 생긴 디스크 증세는 여전했다. 미등록체류자라 병원에 쉽게 갈 수도 없어, 베트남 가족들에게 택배로 약을 받아 하루하루를 견디며 버티고 있다. 최근에는 그나마 남아있던 약도 바닥났다.
통증이 심할 땐 이제 막 여덟 살이 돼 학교에 입학할 딸의 사진을 보며 마음을 달랜다. 가끔 영상통화로 만나는 딸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어서인지 늘 데면데면하다. 응우옌은 "약속했던 10년을 채우는데 딱 2년이 남았다"며 "더 아프지 않고 베트남에 돌아가서 딸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최저임금 이주노동자 건보료는 2배
'건강 사각지대'에 방치된 농어촌 이주노동자 2만여명이 최소한의 보험 혜택조차 받지 못한 채 병마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2019년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건강보험 가입이 의무화되면서, 보험료는 한국사람보다 많이 내면서도 병원 치료는 받지 못하고 있다.
3일 한국일보가 입수한 시민사회단체 '이주민과 함께'의 '이주민 건강권 실태와 의료보장제도 개선방안 연구' 실태조사에 따르면, 농업에 종사하는 이주노동자의 '주관적 건강인지율'은 16.5%에 그쳤다. 국내 채소농장이나 시설재배업 등에서 일하는 농업 이주노동자 10명 중 8명은 자신이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얘기다. 이는 제조업(51%)과 건설업(47.9%), 서비스업(48.1%) 이주노동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국가인권위원회 발주로 1,060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이번 실태조사는 이주노동자 '건강권'을 주제로 이뤄진 첫 연구조사로 평가된다.
농어촌 이주노동자가 정식으로 건강보험 혜택을 받게 된 것은 고작 1년이 넘었다. 사업장에서 자동으로 '직장가입'이 되는 제조업 종사자들과 달리, 5인 미만 소규모 개인사업자가 많은 농어촌에선 사업주가 보험 가입 없이 일을 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다행히 2019년 7월 건강보험 가입자격이 없는 모든 외국인의 가입이 의무화됐다. 하지만 의무가입은 오히려 이주노동자에겐 '족쇄'와 같았다. 건보가입 의무화 조치는 이주노동자에게 의료혜택을 제공하기 위한 순수한 목적이 아니라, 지역 건강보험에 임의가입해 고액 진료를 받고 출국하는 소수 외국인과 재외국민을 막기 위한 징벌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의무가입 조치로 최저임금을 받는 농어촌 이주노동자의 지역가입 월 최소보험료는 2019년 11만3,050원, 2020년 12만3,080원으로 책정됐다. 같은 임금 노동자의 직장가입 평균 보험료보다 2배 가까이 높은 금액이다. 게다가 지역보험은 취약계층에 대한 보험료 감면도 적용되지 않았다. 지난해 12월20일 혹한 속에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숨진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고(故) 누온 속헹씨도 2019년 9월부터 200만원이 넘는 보험료를 냈지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5개국 31명의 이주노동자 만나보니
한국일보가 지난 한 달간 경기 의정부와 강원 홍천, 충북 충주·청주, 경북 의성, 부산, 전남 진도·고흥 등 전국 각지의 베트남·태국·네팔·캄보디아·미얀마 출신 이주노동자 31명을 만나보니 '건강 사각지대'의 그늘은 더 어두웠다.
2019년 여름부터 경북 의성 돼지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네팔 이주노동자 푸르바(가명·41)씨 사례가 대표적이다. 푸르바씨는 경기 포천 채소농장에서 6년 넘게 일했는데, 당시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농약 살포였다. 그는 "한겨울 두 달 정도만 빼고 사시사철 벌레 죽이는 약(살충제), 풀 죽이는 약(제초제)을 뿌렸다. 하루 종일 농약만 뿌린 날도 있었다"고 했다.
푸르바씨가 일했던 농장은 비닐하우스 100동이 넘을 정도로 컸다. 그는 보호막 같은 건 입을 생각도 못했다고 한다. 그는 “하루 종일 농약을 뿌린 날은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어야 할 정도로 두통에 시달린 적도 많다. 매스꺼움이 느껴졌고 나중에는 마비 증상까지 왔다”고 토로했다.
“뭘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사장님도 아무도 안 가르쳐줬어요. 그냥 내가 시장에 가서 면 마스크 사다 썼어요.”
네팔 이주노동자 푸르바(가명·41)
그는 포천이주노동자센터 김달성 목사의 도움을 받아 사업장을 옮겼지만 여전히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작년 4월 경기도 한 병원에서 남성 불임 검사를 받았다. 2011년 네팔에서 결혼 후 10년이 지났는데 아이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푸르바씨는 2012년 한국에 온 뒤에도 틈날 때마다 네팔을 오가며 아내와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결과는 '기형정자증'이었다. 푸르바씨 검사결과를 본 김기영 강서 미즈메디병원 난임전문의는 "자연임신이 힘들 수 있다"며 "원인이 명확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당뇨, 감염, 외상, 영양부족, 흡연, 음주, 살충제 노출 등 여러 요인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네팔에 있는 아내에게 아직 이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화장실 안 보내줘 방광염… 온수도 안 나와
2019년 겨울 한국으로 건너온 네팔 이주노동자 레즈미 크리쉬마(27)씨는 얼마 전까지 강화도 축산농장에서 일했다. 레즈미씨도 "첫 한 달은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고 말했다. 레즈미씨는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반까지 축사 청소와 사료 주는 일을 했는데, 사업주는 쉬는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폭행과 폭언은 늘상이었다고 한다. 사장이 레즈미씨 멱살을 잡고 욕하고, 옷을 잡아당겨 윗옷이 벗겨진 적도 있었다.
레즈미씨가 지난해 3월 소 사료를 주려고 허리를 굽혔는데, 갑자기 통증이 와서 쓰러진 적이 있었다. 급하게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는 '급성방광염' 판정을 내렸다. 병원에선 "화장실에 가지도 못할 정도로 일을 시켜서 걸린 것 같다"고 진단했다고 한다. 레즈미씨가 지난해 낸 건강보험료는 매달 11만1,440원씩 총 145만5,560원인데, 그가 병원에 간 적은 급성방광염 판정을 받은 그날이 유일했다.
경기 포천 채소농장에서 일하는 베트남 이주노동자 전중키엔(31)씨는 왼쪽 손목에 건초염이 걸렸다. 흔히 '드꿰르벵 병'이라고 불리는 건초염은 손목을 많이 사용하는 노동자에게 나타나는 질병으로, 힘줄에 염증이 생기는 병을 말한다. 온수도 나오지 않는 비닐하우스 컨테이너에서 거주하며 난방도 없는 공간에서 장시간 일한 탓에 아침만 되면 손가락 관절이 굽혀지지 않았다. 전중키엔씨는 "병원에 가고 싶다고 사장님에게 말했을 때 '알아서 하라'는 말을 들었다"며 "사장님은 쉬지 말고 일하라고 했는데, 사정사정해서 한 달에 혼자 병원에 3번 다녀왔다"고 말했다.
캄보디아 출신의 이주노동자 A(27)씨도 "한 달에 두세 번만 쉬어서 병원 갈 시간이 없다. 아프다고 하면 사장이 약을 사다 주는 게 전부"라고 말했다. 전북 군산 섬에서 일하던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노동자 4명은 사업주로부터 건보료를 제외하고 월급 150만원을 받고 일했는데, 사장이 건보료를 한 푼도 내지 않아 이들은 체납자가 돼버렸다.
"보험료 꼬박꼬박 내도 병원 가지 말래요"
이처럼 농어촌 이주노동자들은 적지 않은 보험료를 꼬박꼬박 내면서도 의료기관을 이용하기 힘든 환경에 처해 있다. 실태조사에 따르면 농업 이주노동자의 '미충족 의료율'은 62%나 됐다. 제조업 이주노동자(17%)의 4배, 한국인 평균(11.5%)의 6배나 높은 수치다. 미충족 의료율은 의료기관 진단과 검사, 치료가 필요하지만 받지 못한 적이 있다고 답한 비율인데, 농어촌 이주노동자는 이 비율이 전체의 절반이 넘는다는 뜻이다.
가장 큰 이유로는 절반 이상(54.1%)이 '비용이 부담돼서'라고 답했고, '시간이 없어서'(37.4%), '의료진과의 소통이 어려워서'(27.9%), '거리가 멀거나 교통이 불편해서'(11.6%)도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이유로 꼽혔다. 특히 농어촌 이주노동자는 업무와 휴일이 불규칙한데다 업무강도가 높고 의료시설 접근성도 떨어져, 보험료 납부에 따른 혜택을 받기 힘들었다.
이처럼 이주노동자들이 보험료를 낸 만큼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자, 그 혜택은 고스란히 정부에 돌아갔다. 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15~2018년 외국인 가입자의 건보재정 수지는 9,417억원 흑자를 기록했다.
이한숙 부산 이주와인권연구소 소장은 "이주노동자의 병원 외래진료율은 낮은데, 입원이용률은 높다"며 "참을 때까지 참다가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 병원 가는 이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소장은 "농어촌의 경우 사업자등록증이 없어도 이주노동자 직장가입을 허용하거나, 보험료 경감 정책을 적용해 이주노동자 건강보험료를 현실적으로 책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승엽 기자 sylee@hankookilbo.com
김영훈 기자 huni@hankookilbo.com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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