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 칼럼] 10년 전 ‘오박안나박’ 지금도 ‘오박안나박’
이번에 전원 재등장, 세계에 이런 경우 있나
1류 경제에 갑질하는 4류 정치 안 바뀐다
한국 정치의 얼굴은 4년마다 크게 바뀐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절반 안팎이 초선 의원일 정도다. 세계에 이런 나라가 드물 것이다. 그런데 이 새 인물들은 거의 모두가 1회용 소모품이다. 4년간 어디서 뭘 했는지도 모르게 사라진다. 이렇게 신참들이 무더기로 왔다가 무더기로 사라지는 가운데 막후의 주인공은 따로 있다. 언제나 ‘그때 그 사람’이다.
미국과 같은 대통령제를 하지만 한국 정치는 미국 문화와 달리 대통령 출마의 재수, 삼수가 가능하다. 김영삼은 재수, 김대중은 4수, 문재인은 재수로 대통령이 됐다. 이회창은 세 번 출마했고 당내 경선까지 포함하면 박근혜도 두 번 출마했다. 미국에선 대통령 출마를 평생 한 번의 기회로 생각하며 낙선을 자신에 대한 국민의 최종 평가로 받아들인다. 한국에선 대통령 출마는 긴 여정의 시작이며 낙선은 병가지상사다. 유권자들이 이를 용인하니 이제 정치권에선 대통령은 재수는 필수, 삼수는 선택이다. 아마도 1년 남은 내년 대선에도 지난 대선에 출마했던 이재명, 홍준표, 안철수, 유승민을 그대로 또 보게 될 것 같다.
한국이라면 결코 승복하지 않았을 패배를 당한 앨 고어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는 그토록 애석함에도 다음 대선에 출마하지 않았다. 미 국민 전체 투표에선 이기고도 주 선거인단 수에서 밀려 패한 힐러리 클린턴도 다시 출마하지 않았다. 출마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미국 국민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국에선 대선에 어느 정도 득표한 패자들은 당연히 5년 뒤에 또 출마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본인들은 물론이고 유권자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 한국 정치 문화의 장점도 있겠지만 정치인 인물 교체, 세대 교체는 어려워진다. 정치는 인물과 세대가 활발히 교체될 필요가 있는 분야다. 정치인은 특수상대성이론을 발견하는 물리학자가 아니다. 평균적 지식과 학식, 양식을 가진 보통 사람 중에 리더십 있는 사람을 고르는 것이다. 적임자를 뽑기 위해선 많은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질 필요가 있다. 정치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젊은 층이 활발히 참여해야 한다. 기회를 얻었던 사람들, 실패한 사람들이 물러나야 이 과정이 원활하게 작동한다. 한국 정치에선 반대로 소수의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회를 독점한다.
이런 한국 정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무대가 이번 서울시장 선거다. 2011년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문제로 물러나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벌어졌다. 당시 야권에서 가장 지지율이 높던 무소속 안철수가 무소속 박원순에게 후보를 양보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여당에선 나경원이, 야당에선 박영선이 당내 경선에서 승리해 후보가 됐다. 이때 야당 당내 경선에 출마했던 사람 중 한 명이 추미애다. 박원순은 박영선과 야권 후보 단일화에서 이기고 다시 본선에서 나경원에게 승리해 서울시장이 됐다.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에 또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하게 됐다. 이번에는 박원순이 성추행으로 극단 선택을 해 선거를 하게 됐다. 10년 전 박원순에게 양보했던 안철수는 이번에도 제3의 유력 후보다. 여당 당내 경선은 이번에도 박영선이 선두라고 한다. 추미애도 또 서울시장을 노렸으나 법무장관으로 인심을 잃어 나오지 못했다. 야당 당내 경선 역시 이번에도 오세훈과 나경원이 선두권이라고 한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여야만 바뀌었을 뿐 등장인물은 박원순, 박영선, 나경원, 오세훈, 안철수 그대로다. 2년 전 2018 서울시장 선거 때도 이들은 그대로 등장했었다. 여당 경선이 박원순, 박영선 간에 치러졌고 안철수는 본선에 출마했다. 서울시장 선거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오박안나박’이다. 세계 정치에 이런 경우는 없을 것이다. 지난 10년간 한국 정치는 인물 면에선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여당도 그렇지만 바람을 일으켜야 하는 야당마저 그렇다.
정치인들은 언론이 문제라고 한다. 언론이 새 인물을 무시하고 기존 사람들 위주로 보도하니 인물 교체가 일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일리는 있다. 그러나 노력하고 도전하는 신인들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야당이 그렇다. 이미 기회를 가졌던 사람들도 너무 물러서지 않는다. 선거 개근상을 줘야 할 정도다. 앞 물이 흘러가야 뒤 물이 자리를 채운다. 유권자들이 정당 이름만 보고 묻지마 투표를 계속하면 당내 터줏대감들이 욕심을 내려놓기 힘들다. 당 간판으로 득표가 보장되고 당내 경선은 유리한데 물러설 까닭이 없다. 10년 전 배우들이 옷만 바꿔 입고 전부 다시 재출동한 서울시장 선거는 낡고 뒤떨어진 한국 정치의 한 단면이다. 이래서 1류 경제에 갑질하는 4류 정치가 바뀔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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