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에서 대화가 시작됐다, 한글이 태어났다

정상혁 기자 2021. 2. 4.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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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00년 한글특별전 'ㄱ의 순간']
⑭참여 작가 인터뷰 오수환 화가
신작 ‘대화―한글1’ 앞에 선 화가 오수환. “가장 간략한 기호가 붓의 속도와 촉감을 드러낸다”며 “획마다 춤처럼 신체성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태초에 적막이 있었다.

화가 오수환(75)씨는 최소의 붓질로 화면을 비워낸 ‘적막’ 연작으로 침묵의 세계를 드러내왔다. “죽음에 대한 고민이 ‘적막’을 불렀고 이후 ‘변화’ 연작으로 나아갔다. 만물이 계속 변하듯 생명의 운율을 그렸다.” 이윽고 ‘대화’가 시작됐다. “‘대화' 연작에 이르러 그림 속에서 색채와 기호가 어우러져 묻고 답하고 있다.”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 한글 특별전 ‘ㄱ의 순간’에 오씨가 출품한 ‘대화–한글’ 연작은 적막→변화→대화라는 언어의 발전 단계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노랑빛 바탕에 거대한 ‘ㄱ’과 ‘ㄴ’을 그려넣은 ‘대화–한글1’은 “수직과 수평의 건축적 대화”다. 알록달록 한글 자모(字母)와 추상의 기호가 어울린 ‘대화–한글2’는 “기호와 비(非)기호의 결합”이다. 이로 인해 “한글이 무한성으로 나아간다”고 했다. “한글은 미니멀리즘의 조류와 대화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조형성을 보여준다.” 전시는 이달 28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전관과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에서 열린다.

'대화-한글2'는 알록달록한 한글의 자모(字母)와 해독 불가의 형상을 함께 배치함으로써 글자의 확장성을 꾀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서양화를 가장 동양적으로 풀어내는 화가로 손꼽힌다. 유화로 서예의 감각을 내는 까닭이다. 경남 진주의 한학자 집안에서 자랐으나, 서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미적 탐색의 시간”이었다. 그림 때문에 월남전도 참전했다. “페르낭 레제·피카소 등 당대 유명 화가들의 공통 테마가 전쟁이었다. 전쟁에 대해 알고 싶어 이등병 때 자원했다.” 15개월간의 파병, 거기서 인간의 극단적 유한성을 목격했다. 귀국 후 사회파 그림을 그렸다. “‘현실과 발언' 같은 민중미술 모임에도 참여했으나 회의가 몰려왔다. 부자유 때문이었다.” 1980년대 이후 순수 추상으로 넘어왔다. 이미 해외에서는 언어를 활용한 개념 미술이 활발했고, 특히 평면 회화에서 글씨가 주목받고 있었다. “복잡한 것에 염증을 느꼈다. 회화가 단순해지려면 서양식 명암법을 그만두고, 선(線)의 요소만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단출한 가락처럼.”

그가 부려놓은 획은 얼핏 일필휘지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명암과 미묘한 먹색의 변화가 있다. 수차례 가획(加劃)했기 때문이다. “반복하지 않으면 깊이가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이백·소동파·황정견 등의 한시(漢詩)의 정취도 담겨있다. “동양 문학이라는 것이 대개 유불선(儒佛仙)에 기초하지 않나. 결국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자각이다. 내 그림도 일부러 꾸미거나 뜻을 더하지 않는 것, 무위(無爲)의 표현이다. 이성과 감성의 균형, 그 안에서 자연·인간·그림의 일치가 가능하다.”

한글도 천·지·인이 결합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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