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허증·자격증이 폰 속으로.. 코로나가 앞당긴 디지털 신분증
지갑이 필요 없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 따로 신분증이나 카드를 챙기지 않아도 된다. 회사 출입이나 근무시간 체크를 위해 매일 아침 사원증을 목에 걸 필요도 없다. 심지어 자동차 키도 조만간 과거의 유물이 될지 모른다.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스마트폰을 신체 일부처럼 자연스레 사용하는 인류) 시대에 스마트폰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면서 벌어질 풍경이다.
먼 미래의 얘기가 아니다. 행정안전부는 지난달 14일 모바일 공무원증을 도입한 데 이어 오는 12월 전 국민 누구나 플라스틱 운전면허증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 모바일 운전면허증을 활용할 수 있는 서비스를 시작할 예정이다. 장애인 등록증(2022년), 외국인 등록증(2023년), 국가유공자증(2024년)도 순차적으로 스마트폰 속으로 들어간다. 정보처리기사, 한식요리기능사 등 국가기술 자격증 495종은 이미 네이버 앱(응용 프로그램) 또는 카카오앱에 넣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다. 디지털 신분증 시대가 어느새 현실에 성큼 다가온 것이다.
◇코로나 사태, 디지털 신분증 시대 앞당겨
디지털 신분증은 해외에선 이미 여러 국가에서 활용되고 있다. 네덜란드의 모바일 디지털 신분증 ‘디히데(DigiD)’는 여권·운전면허증과 같은 신원 확인 효력을 갖는다. 현재 납세 같은 정부 행정 업무를 비롯해 교육, 건강 의료 서비스를 받을 때 사용할 수 있다. 주류를 구매하려면 19세 이상이라는 것만 확인시켜주고, 차량을 빌릴 때는 운전면허 보유 여부만 노출하게 하는 등 개인 정보 노출도 최소화했다. 일부 정보만 선택적으로 가리기 어려운 실물 신분증과 달리 디지털 신분증이 갖고 있는 차별화된 기능이다. 노르웨이에서는 이미 220만 명이 전자 운전면허증을 사용하고 있다. 핀란드의 DDL은 보건·교육·은행·보험 업무에 사용할 수 있다.
중국은 작년 베이징에서 블록체인 기반 전자신분증과 각종 행정 증명서를 시범 발급했다. 신분증, 주거증, 운전면허증, 혼인·이혼증 등 7가지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는데, 알리페이 앱에서 안면 인식과 인증 번호만 입력하면 된다. 인도는 전 국민이 아다르(Aadhaar) 앱을 통해 신원을 증명할 수 있고, 철도·공항 같은 공공 서비스도 이용 가능하다. 나이지리아에서도 모바일 신분증(NIMC-MobileID)을 정부 부처, 통신사, 은행에서 사용할 수 있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코로나 팬데믹(대유행)은 디지털 신분증 확산의 촉매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영국·이스라엘 등에서는 코로나 백신을 맞았는지 모바일 앱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백신 여권’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오러클, 세일즈포스 등 글로벌 IT 기업들도 최근 백신 여권 기술 개발에 착수했다. 오프라인에서 실물 증명서나 여권을 확인하는 대신 온라인·비접촉으로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코로나 전염 위험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전문가들은 IT기술이 발전할수록 디지털 신분증의 영향력이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기혁 중앙대 융합보안학과 교수는 “예를 들어 자율주행 무인차가 상용화되면 디지털 운전면허증이 있어야 차에 시동을 걸고 목적지를 설정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 “응급시 운전 권한과 사고 책임 여부도 디지털 신분증을 이용해 가려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안성·신뢰도 더 높여야
디지털 신분증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국내 기업들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지난달 연말정산이 그 전초전이었다. 디지털 인증 시장의 맹주였던 공인인증서가 폐지되자, 네이버·카카오·NHN페이코·이동통신 3사(PASS) 등이 각각 디지털 인증서를 만들어 사용자를 끌어모으기 위해 치열한 유치전을 벌였다. 각 기업들이 디지털 신분증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디지털 신분증이 쇼핑·결제·금융 시스템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디지털 신분증이 주민등록증·운전면허증을 대체하고, 여기에 간편 결제를 결합하면 신용카드와 교통카드도 대체할 수 있다. 인터넷 포털이나 통신 업체 입장에서는 다양한 서비스를 한꺼번에 제공하면서 사용자가 자사 서비스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게 해 영향력을 키울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누가 사용자의 지갑을 통째로 거머쥐느냐가 걸린 싸움인 셈이다.
디지털 신분증 확산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사용이 편리한 데다 각종 보안 장치도 있지만, 스마트폰을 분실하거나 해킹당할 경우에는 엄청난 양의 개인 정보가 한꺼번에 유출되는 위험이 있다. 실제로 2011년 네덜란드에서는 디지털 신분증 보안 담당 회사가 해킹을 당해 고객 수백명의 보안 인증서가 유출되기도 했다. 정부나 특정 기업이 개인을 감시하거나 정보를 악용할 가능성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정태명 성균관대 소프트웨어학과 교수는 “사용자가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디지털 신분증에 대한 분실 및 보안 대책을 강화하고, 관련 기술에 대한 국민 신뢰도를 더 높여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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