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열병식 노래'가 된 한국 민중가요[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북한은 열병식을 보통 1년 내내 준비한다. 이번 열병식 참가자들이 작년 10월 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도 했음을 감안하면 이들은 2019년 10월에 뽑혀 1년 3개월 동안 행진 연습만 했을 것이다. 열병식 참가자들은 행사 반년 전부터 철조망으로 차단된 평양 미림비행장의 훈련장에 들어가 훈련을 한다. 이번 참가자들은 작년 4월 초 평양에 와서 1월까지 9개월 동안 외출도 거의 못 하고 살았을 것이다.
한 개 열병조는 보통 297명으로 구성되는데 지휘관과 기수 9명, 횡대 24명, 종대 14명이다. 만약을 대비해 조마다 20명 남짓의 예비 인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훈련 때는 각 조가 약 320명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김일성광장 주석단 앞 216m 구간을 보폭 70cm로 1분 40초 동안 정확히 통과하기 위해 1년을 바친다. 그나마 이번 열병식은 발을 60cm 높이로 정확하게 맞추는 ‘천리마발차기’가 없어 좀 수월했을 것 같다.
훈련생들은 오전 6시 전에 기상해 청소와 식사를 한 뒤 8시부터 열병 훈련을 시작한다. 지적을 받으면 저녁을 먹고 추가로 처벌 훈련을 받는다. 하루 종일 딱딱한 바닥에 발을 힘껏 구르니 방광이 망가져 피오줌이 나오고, 다리 근육이 굳어져 변기에 제대로 앉지도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야외에서 훈련하니 여름엔 더워서 죽고, 겨울엔 추워서 죽을 지경이다.
훈련에서는 횡대 24명이 가장 중요하다. 밥 먹을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24명이 다 같이 움직이고, 기합을 받아도 다 같이 받는다. 1년 넘게 이렇게 훈련하다 보면 형제처럼 친해지게 된다. 악밖에 남지 않는 지옥의 훈련장에서도 참가자들은 서로 격려하며 힘든 과정을 이겨낸다. 2시간 행진 훈련 뒤 주어지는 30분 휴식 시간엔 털썩 주저앉아 누군가 선창하는 노래를 너도나도 따라 부르는 광경이 펼쳐진다.
2002년 김일성 생일 90주년 기념 열병식 훈련장에선 이런 일도 있었다. ‘열병식노래’라고 퍼져 훈련장과 김일성광장 모의 열병식에서 모두가 떼창을 하며 힘을 얻었던 가요가 한국 민중가요인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었다. 탈북해 한국에 온 당시 열병식 참가자 3명을 만나 물어보니 이 가요가 열병식 훈련장에서 6개월 내내 압도적 인기를 끌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증언했다. 한 명은 한국에 와서 자기가 알던 ‘열병식 노래’가 한국 민중가요임을 알았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의 가사는 어쩌면 열병식 맞춤형으로 지어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된 훈련에 지친 사람들에게 딱 맞다.
특히 후렴구인 ‘해 떨어져 어두운 길을 서로 일으켜주고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마침내 하나 됨을 위하여’라는 구절은 열병식 참가자들이 잊지 못한다. 동작의 하나 됨을 위해 영하의 칼바람이 몰아치는 어두운 벌판에 처벌 훈련을 하느라 남겨졌을 때 아픈 다리 서로 기대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절절했을까. 그들이 악을 쓰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상상하니 가슴이 아프다.
문제는 열병식 참가자 몇만 명이 합창했던 이 노래가 한국 가요인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다들 그냥 누가 우리의 마음을 담아 자작곡을 지었나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장성급부터 시작해 지휘관들이 있었지만, 직급이 높다고 한국 노래 들어본 것은 아니니 몰라서 그냥 방치한 것이다.
나중에 열병식 참가자들이 고향으로 가 퍼뜨리는 바람에 이 노래는 2002년 북한에서 최고로 유행한 가요 중 하나가 됐다. 독재 정권을 찬양하느라 준비하는 열병식에서 한국의 민중가요가 가장 사랑받는 노래가 돼 김일성광장에서까지 떼창으로 불렸다니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듬해 남쪽에서 참여정부(노무현 정부)가 출범하자 이 노래는 다시 한 번 크게 유행했다. 그런데 국민의 화합과 협력을 이뤄내야 하는 집권 세력이 ‘투쟁 속에 동지 모아 마침내 하나 되겠다’고 떼창을 부르면 시대착오적이란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오늘날 이 민중가요는 어둠 속에서 지치고 힘든 북한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노래일 것이기 때문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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