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재난을 똑바로 못 보는 한국 정치
[경향신문]
나는 경기도민이다. 동네 네거리에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1인당 10만원 지급” 현수막이 걸려 있다. 돈을 준다니 반겨야겠지만 마음은 불편하다. 코로나19 재난에 대응한다면서 굳이 모두에게 주어야 할까.
모든 국민이 코로나19로 불편한 일상을 겪고 있지만 경제적 타격은 사람마다 다르다. 이미 K자 양극화가 확연하다. 코로나19에도 디지털·플랫폼 업종은 호황을 누리고, 일부 집 가진 사람과 주식투자자들은 가격 상승에 들떠 있다. 안정적 기업에서 일하는 종사자 역시 재택근무가 익숙하지 않을 뿐 경제적 어려움은 없다. 반면 영업을 못하거나 소득이 급감해 하루하루가 막막한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제는 국회 앞에서 “얼마 전 유서를 작성했습니다”라며 자영업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행정은 권력을 위임받은 만큼 민생을 책임질 의무를 지닌다. 어떤 상황이든 최선을 추구해야 한다. 폐업 직전까지 몰린 자영업자, 일거리가 줄어든 특수고용노동자 등이 벼랑에 서 있다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거다.
유럽 나라들을 본받자. 이들은 피해가 발생하면 두껍게 지원한다. 지난달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한 선진경제 21개국의 코로나19 대응 직접 지출이 평균 GDP 9.3%로 한국의 3.4%를 크게 앞선다. 코로나19 확산 정도가 다르다 해도 현재 우리나라 소상공인·자영업자·특수고용노동자들을 위한 지원이 턱없이 부족한 건 분명하다. 독일의 경우 매출이 전년 대비 70% 이상 감소하면 임차료, 직원 급여, 감가상각비, 보험료 등 고정비용의 90%를 보상하듯이 지원이 실질적이다. 영업금지를 당해도 지원금이 일회성 300만원에 그치는 한국과 확연히 비교된다.
또 하나 주목할 특징은 ‘필요’에 기반한 지원이다. 계층·집단마다 피해 정도를 고려한다. 보통 매출의 손실 폭에 따라 지원 비율을 정하는 방식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전 국민 지원을 둘러싸고 계속 논란이 인다. 피해 정도에 맞추어 대상과 지원액을 정하는 서구의 눈에서는 다소 의아한 일이다. 그들에겐 코로나19 영향이 사람마다 다르기에 대응 정책도 대상별 필요에 맞추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재난에서 전 국민 지원금을 시행한 나라가 한국, 미국, 일본 그리고 싱가포르와 홍콩 등 일부 도시국가에 한정된 이유이다.
왜 한국에선 유독 전 국민 재난지원금이 부상할까? 사회안전망이 빈약해 전 국민 지급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현실 진단은 맞지만 해법이 그러해야 할 근거는 약하다. 긴급지원은 정확한 소득 파악을 요구하지 않는다. 세금을 걷는 일이 아니기에 현재의 영업 수준을 알면 충분하다. 서구도 최종이익이나 과세소득이 아니라 영업과정의 매출을 기준으로 감소폭을 보상한다. 한국은 신용카드 사용이 일반화됐고, 거의 모든 거래 이력이 은행 계좌에 기록돼 있다. 처음엔 번거롭더라도 한두번 진행하면 매출이나 수입 자료 양식을 정리할 수 있다. 만약 자료가 없는 무등록 자영업자 등이 우려된다면 한시적으로 포괄적 긴급부조를 통한 보완이 가능하다. 지난 1년의 경험에서 얻은 정책 수행 기반을 가볍게 여기지 말자. 대통령도 “(2차, 3차 지원금으로) 피해 입는 대상을 대체로 선별할 수 있게 됐고 또 선별에 많은 행정적 시간이 소요되지 않는다는 자신도 생겨났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정치권에서는 10년 전 무상급식에서 시작된 보편 대 선별 구도도 꺼낸다. 복지의 보편주의는 필요가 있을 때 누구든 받을 권리를 의미하지 어떤 경우든 무차별로 동일액을 제공하자는 원리가 아니다. 또한 국민 위로금이라는데, 코로나19에 지친 국민에게 진정한 위로는 소액의 돈보다는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 내 세금이 사용된다는 믿음과 자부심이어야 하지 않을까. 소비 진작 역시 지원방식보다는 재정 규모가 관건이며 지금처럼 집합제한 방역 상황에선 그나마 취지도 약화된다.
소득파악 틈새의 지나친 부각, 보편적 복지에 대한 일면적 이해, 중상층 이해에 치우친 정치 지형, 그리고 ‘기본소득’ 상표를 향한 어떤 일념. 한국에서 이토록 전 국민 재난지원금이 정치 의제가 되는 배경이다. 그 결과 재난 시대에도 한국 정치는 재난을 직시하지 않는다. 임대료에도 못미치는 금액으로 ‘지원’했다 생색내고, 여러 곳간의 돈을 다 모아 10만원씩 주면서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을 거라 홍보한다. 양극화와 불평등의 해결사를 자처하는 정치인이 수없이 많지만 실제 민생은 수사로만 활용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오늘도 네거리 현수막을 보며 묻는다. 그렇게 어렵게 조성한 재정을 도민 모두에게 소액으로 나누는 게 민생일까? 제발, 재난에는 재난 대책을.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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