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 박원순,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송현숙 논설위원 2021. 2. 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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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 열흘 ‘성추행’을 둘러싸고 상상 이상의 일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지난달 25일 정의당 김종철 대표의 장혜영 의원 성추행 발표와 사퇴, 같은 날 국가인권위원회의 박원순 전 시장 성희롱 인정 결론, 이튿날부터 더불어민주당과 여성위원회와 남인순 의원, 이낙연 대표의 연이은 사과 그리고 오거돈 전 부산시장 기소까지. 이로 희미해져가던 오는 4월 보궐선거의 근원이 열흘간 반짝 조명됐다. 그리고 다시 부동산과 대북 원전 지원 의혹 등의 이슈에 묻혀가고 있다.

송현숙 논설위원

지난해 7월 박원순 시장 사망 때도 마찬가지였다. 충격은 컸지만, 진상규명이 덜 됐다는 이유로 후속 논의나 조치 없이 묻혀 있다가 선거용으로 재소환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민주당은 서울·부산 시장 후보를 내려 당헌을 바꾸면서 ‘젠더 폭력신고 상담센터’를 열어 주요 당직자 등의 성비위 조사와 성인지 교육 강화를 약속했다. 그러나 석 달간 이 센터가 뭘 했는지 알려진 바 없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후보를 낼 자격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더니, 급기야 대정부질문에 ‘성폭력 프레임 씌우기’까지 끌어들였다.

권력형 성폭력은 왜 되풀이되는가. 근본 해법은 뭔가. 한마디로 ‘성평등 문화의 부재’가 성폭력이 싹트는 온상이다. 최근 잇달아 터진 ‘사건’들도 위계적, 성차별적 조직문화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인권위의 ‘박원순 사건’ 직권조사 결과 발표에서 눈여겨볼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다. 서울시 관계자들의 성희롱 묵인·방조 혐의는 인정되지 않았다. 이들이 성인지 감수성이 낮아 성희롱의 속성이나 위계구조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박 전 시장과 피해자의 관계를 친밀한 관계로만 봤다고 인권위는 설명했다. 성희롱이 뭔지조차 모르는 조직, 성역할 고정관념이 굳건한 차별적 문화에서 법령, 제도가 바뀐들 개선책이 될까. 서울시에서 터졌을 뿐 우리 사회 곳곳이 화약고다.

최근 노동시민단체 직장갑질 119가 3년간 접수된 직장 내 성희롱 364건을 분석했는데, 10명 중 9명은 상사가 가해자였다. 신고했다는 비율은 37% 뿐이었고, 그중 90% 이상은 신고 후 오히려 징계나 따돌림 등 불이익을 받았다고 한다. 서울시 공무원은 여성이 절반이 넘지만, 실·국장급인 3급 이상 중 여성은 15.7%(51명 중 8명)에 불과하다. 임금도, 권한도 남성에 기울어진 구조 속에서 여성은 ‘그렇게 대해도 되는 존재’라는 인식이 위아래, 좌우 할 것 없이 뿌리 깊다.

2014년 프랑스 파리 사상 첫 여성시장이 된 뒤 지난해 압도적으로 재선에 성공한 안 이달고가 지난 연말 또 한번 화제가 됐다. 프랑스엔 고위 관리직 임명 때 60% 이상을 특정한 성으로 채우지 못하는 국가규정이 있는데, 파리시가 2018년 18명 중 11명(69%)을 여성으로 임명해 9만유로(1억2000만원) 벌금이 부과된 것이다. 반응이 압권이다. 이달고는 “벌금을 물어 기쁘다”며 고위직 여성은 아직 47%뿐이니 성평등에 더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했다. 이달고는 뚜렷한 성평등 소신 위에 생태주의에 기반한 21세기형 가치를 환경, 교통, 노동, 주거 정책 등에 성공적으로 구현해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지난달 전 세계가 주목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 당시 주요뉴스 중 하나는 ‘성평등 국가로의 발전’을 위한 ‘백악관 젠더정책위원회’ 출범이었다. 성평등은 이미 강력하고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떠오르고 있다.

2021년 서울시장 선거의 시대정신은 부동산이 아니라 성평등이 되어야 한다. 갑작스러운 시장의 유고로 충격에 빠졌던 시민들의 상처를, 성폭력 문제만큼은 뿌리 뽑겠다는 결기와 촘촘한 실행계획, 성평등 도시를 약속하는 것으로 위로해야 한다. 최소한 성평등의 주춧돌 위에 부동산이니, 스마트도시니 다른 공약들을 올려놓으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슬쩍 넘어간다면 똑같은 잘못이 반복될 뿐이다. 선거전 초반이긴 하지만 후보들의 행보를 보면 쓴웃음만 나온다. 21세기에 ‘원조 친문’ ‘문재인 보유국’ 등이 웬 말인가. 식사준비하는 엄마로 감성을 자극한, 퇴행적인 성역할로 예능쇼에 출연해 뭘 보여주려는 건가. 정권을 지켜서, 혹은 정권을 심판해서 시민들이 얻는 것이 대체 뭐란 말인가. 고민과 철학의 부재를 보여주는 행보들을 보면서 우리 정치의 수준을 탄식하게 된다.

지금부터라도 모든 후보가 더욱 치열하게 성평등 정책을 토론하기 바란다. ‘박원순 사건’을 겪고도 제자리라면, 수백억원이 들어가는 보궐선거가 ‘성인지 집단 학습 기회’조차 되지 않는다면 정말 참담하지 않은가.

송현숙 논설위원 so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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