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대리효도
[경향신문]
지난 추석 때 처가에 갔다가 급체를 하고 말았다. 명절 음식을 푸짐하게 먹어서? 나의 소화능력은 평균 이상이다. 음식이 잘못 되어서? 오, 그럴 리가. 이유는 TV에서 끝없이 흘러나오는 트로트 때문이었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가수들이 비슷비슷한 창법으로 비슷비슷한 노래를 부른다. 집이었다면 바로 채널을 돌렸겠지만 나는 처가에서 리모컨을 잡는 사위가 아니다. 연신 잔을 비우며 술의 힘으로 그 고난을 이겨내려 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결국 집을 뛰쳐나가 한 시간 정도 쌀쌀한 밤거리를 걸은 후에야 속을 달랠 수 있었다.
트로트로 공간을 채우는 집이 처가만은 아니었다. 우리 엄마는 평생 트로트에 관심이 없었다. 1970년대 명동에서 놀던 분답게 양희은의 오랜 팬이었으며 몇 년 전에는 장미여관의 팬을 자처하기도 했다. 집에서 단 한번도 트로트를 들었던 기억이 없다. <미스 트롯> <미스터 트롯>이 장안의 화제가 되었을 때조차 출연 가수 얘기를 한 적이 없다. 그러던 엄마가 어느 날 갑자기 김호중의 팬이 됐다. 처음엔 그러려니 했다. 장미여관 정도의 팬심이려니 했다. 아니었다. 팬미팅 티켓을 구해달라는 청탁을 시작으로 온갖 청탁이 이어졌다. 평론가로서 김호중에 대해 한번 써야 하는 것 아니냐는 강요에 가까운 권고를 받았을 때 심상찮음을 깨달았다.
갈수록 상황은 심각해졌다. 통화할 때 반드시 ‘호중이’ 얘기를 하고, 꽤 높은 확률로 목소리가 촉촉해졌다. 관련 상품이 나오면 모바일에 서툰 엄마를 대신해 대리 구매를 해야 했다. 음반은 물론이고 책에 영화에…. 김호중이 입대하지 않았다면 끝이 없었을 것이다. 코로나19로 공연업계가 중단되지 않았다면 ‘피케팅’ 대리를 했어야 할 것이다. 송가인 열풍이 불었을 때, 인터넷에 올라오는 자식들의 증언을 보며 재밌어 했다. 주말이면 태극기 들고 광화문을 가던 아버지가 송가인의 행사를 쫓아 전국을 누비고 계신다든가, 팔순 노인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송가인 굿즈로 치장한다든가 하는 그런 얘기들. 남 이야기니까 재미만 있지 정작 내 이야기가 되니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려니 하다가 증세가 심해질수록 귀찮아지고 짜증도 났다. 중학교 때 헤비메탈에 빠져들어 내 방 벽을 해외 밴드 포스터로 도배했을 때 엄마의 심정이 이랬을까 싶었다.
마침내 김호중 팬인 친구 집에서 며칠을 머물렀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렇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칠순의 노인에게 벼락처럼 찾아온 사랑. 엄마는 늘 에너지가 넘쳤다. 많은 엄마들이 그러하듯, 그 에너지를 가족에게 쏟았다. 나와 남동생은 거기서 벗어나려 애썼다. 무뚝뚝한 세 남자 틈바구니에서 엄마의 넘치는 에너지는 공허한 메아리 같았을 것이다. 가슴 한편은 늘 답답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덕질을 하는 것만으로 보상받는 듯한 기분이 드는 존재를 만났다. 인정하기로 했다. 김호중을 통해 대리효도를 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송가인에 빠져 전국을 누볐다던 누군가의 아버지, “왜 임영웅이 아니고 김호중이시래?” 반문하시던 장모님, 모두가 같은 마음일 것이다. 자식이 채워줄 수 없는 마음의 허전함을 달래주는 ‘어른들의 아이돌’을 통해 우리는 모두 대리효도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나로서도 편한 일이다. 덕분에 엄마에게서 전화로 시시콜콜한 잔소리를 듣는 빈도도 현격히 줄었다. 명확한 ‘니즈’가 생겼으니 채워주기도 한결 쉬워졌다. 이 어찌 이득이라 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다행히도 아버지는 여전히 트로트에 관심이 없으시기 때문에 설 때 뵈러 가도 트로트 지옥에 빠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저 아리스(김호중 팬클럽) 단톡방에서 생긴 일을 적당히 맞장구치는 것만으로도 나의 대리효도 게이지는 차곡차곡 쌓일 것이다. 이렇게나마 김호중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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