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한 국가가 필요하다

한승혜 2021. 2. 4. 02:5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성원 그림

몇 년 전 인터넷을 검색하다 이런 게시물을 본 적이 있다. 누군가 ‘집에 회초리 있느냐’고, 아이에게 체벌을 해야 할 것 같아 고민이 된다고 질문한 것이다. 그 밑에 ‘아이를 왜 때리느냐?’ ‘체벌하지 않고도 충분히 지도할 수 있다’는 답변도 있었지만, 동시에 아이가 나쁜 행동을 하면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는 댓글이 줄줄이 달리기도 했다. 개중에는 체벌은 육아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아이를 때리는 것은 부모도 같이 고통을 느끼는 행위라는 기상천외한 대답도 있었다.

원영이 사건, 이서현 사건 등 아동이 문자 그대로 양육자에게 ‘맞아 죽은’ 사건이 해마다 일어난다. 보육시설에서 학대당하는 아이들의 이야기 역시 하루가 다르게 들려온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람들은 분노하고, 가해자를 비난하고, 정의감에 불타오른다. 청와대에 국민청원을 넣는 동시에 가해자를 잡아다 똑같이 패줘야 한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런 이들이 한편으로는 아이의 행동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매를 들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맘충’ 같은 용어를 비판하거나, 아이를 키우기에 어려운 환경 등을 지적하는 기사에는 어김없이 맥락과 상관없는 댓글이 달린다. “그러게 누가 낳으래? 자기 자식이면 알아서 해결해야지. 남에게 민폐 끼치지 말고.”

〈아동학대에 관한 뒤늦은 기록〉은 한겨레신문 탐사기획팀이 학대로 사망한 아이들의 실태를 조사한 책이다. 이들은 각종 자료를 모으고 분석해 아동학대의 현주소를 살피고, 알려지지 않았던 아동학대 사건의 진실을 추적해나간다. 본질적인 문제점과 이러한 비극이 쉽사리 개선되지 않는 이유를 철저한 조사를 통해 꼼꼼히 조망한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학대로 사망하는 아이 관련해서는 거의 최고 순위를 달리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아이가 맞아 죽는 나라. 이것이 코로나19 시대를 겪으며 새롭게 부상한 자랑스러운 선진국의 실체이다. 그렇다면 한국 부모들은 왜 그럴까? 한국인들이 유난히 잔인한 유전자를 타고나는 것일까? 당연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책에서 제시하는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귀결된다. 한국의 폐쇄적이며 ‘전형적인’ 가족구조와 사회시스템의 부재가 그것이다. 한국의 가족제도는 여성과 남성의 ‘정상적인’  결합만이 인정되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가족 구성원에게 권리와 책임이 오롯이 부과된다.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구조로 인해 구성원이 쉽사리 벗어날 수가 없다. 아이를 살해하여 감옥에 수감된 양육자가 살아남은 다른 아이에 대한 친권을 여전히 유지하며, 아이를 살해하고 자살한 부모의 이야기가 ‘일가족 동반자살’이라는 타이틀로 보도되는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동학대는 일반적으로 계모·계부 가정에서 일어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80% 이상의 사건이 친부모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또한 어린이집 등의 보육기관에서 일어나는 학대는 전체의 4%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사회나 언론은 늘 계부·계모를 강조하거나 보육교사의 사건만을 크게 다룬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 ‘내가 마음 놓고 손가락질할 대상’이기 위하여 학대 가해자는 계부모 또는 보육교사로 자연스럽게 집중되는 것이다. 요즘 논란이 되는 16개월 아동 살해 사건의 양육자 역시 평소 다른 아동학대 사건에는 몹시 분노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동학대는 제대로 신고조차 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보육기관이나 병원에서는 일이 시끄러워질까 봐 알고도 묵인하는 경우가 많으며, 설사 신고가 들어가더라도 부모가 아이를 훈육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일로 치부하여 일단락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체벌을 부모의 권리이자 일종의 ‘의무’로 생각하고 살아온 세월이 길다 보니, 아동학대를 어디까지나 ‘남의 일’로만 여기는 것이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누가 신경 쓰는가

사회적 안전망 역시 부재하다. 국가의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며, 학대당하는 아이를 보호할 장소 및 아이들을 케어할 전문인력 역시 허덕이는 상황이다. 사회복지사들이 사용하는 도구는 매우 복잡하고 비실용적으로 되어 있음에도 개선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사명감’에 기대어 자신을 갈아 넣어야만 지속 가능하다. 그렇게 헌신적으로 일해도 오히려 ‘천륜’을 갈라놓은 천하에 몹쓸 사람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실제로 직장인 익명게시판인 블라인드에는 학대가 의심되는 아동을 보호자와 분리 조치하려다 2년간 정직 처분을 당한 경찰관의 생생한 사례가 올라오기도 했다.

가장 결정적으로는 단편적인 해결책과 관심만을 일삼는 정부와 사회가 근본 원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아이들은 죽지 않으면 관심을 받지 못한다. 몇 년 전 사설 위탁모가 15개월 아이를 학대해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을 둘러싼 모든 것이 비극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화가 났던 것은 사건 뒤에 ‘살아남은 아이들’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부분이었다. 당시 위탁모 김씨가 운영하던 시설에는 죽은 아이 외에도 아이가 4명 더 있었다. 그럼에도 나머지 4명의 아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찾아본 언론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

아이 관련 유명한 격언으로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문장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장을 오지랖의 상징처럼 여기고 거부감을 갖고는 하지만, 여기에서 ‘한 마을’이라는 것은 타인이 아니다. 국가나 공동체를 의미한다. 한 사람의 안위가 이상한 개인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면 그 자체로 위험할 수밖에 없다. 가족제도는 보호자의 ‘인성’ 하나만에 기댈 것이 아니라 반드시 공동체와 사회시스템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정부는 출산율을 높이기 이전에 태어난 아이들의 사망률을 낮추는 문제부터 신경 써야 할 것이다. 그야말로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 아니 한 국가가.

한승혜 (작가·칼럼니스트) editor@sisain.co.kr

싱싱한 뉴스 생생한 분석 시사IN (www.sisain.co.kr) - [ 시사IN 구독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