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포럼] 탐욕과 분노의 공매도 전쟁

주춘렬 2021. 2. 3.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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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스톱 싸움, 월가 탐욕 응징
헤지펀드 손실 20조원 웃돌아
똑똑한 개미, 금융민주화 시동
'기울어진 운동장' 바로잡아야

“월가를 점령하라.”

2013년 9월 17일 미국 뉴욕 맨해튼 주코티 공원. 30여명의 시위대가 월가의 탐욕을 비판하며 이 구호를 외쳤다. 이들은 미국을 경제위기에 몰아넣고도 거액의 퇴직금을 챙겨 떠나는 월가 최고경영자(CEO)들에게 분노했다. 대형 투자은행들은 2008년 비우량주택담보대출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짜깁기해 2차, 3차 파생상품을 만들어 팔았고 그 돈으로 모기지를 늘렸다. 모래 위에 쌓아 올린 고층빌딩은 와르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수백만명의 미국민이 집을 잃고 길거리로 내몰렸지만 은행들은 구제금융으로 부활했다.
주춘렬 논설위원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0여년이 흐른 뒤 월가의 탐욕을 응징하는 희대의 복수극이 벌어졌다. 미 비디오게임 유통업체인 게임스톱을 놓고 개미 투자자 군단과 헤지펀드 사이에 공매도 전쟁이 발발했다. 공매도란 주식을 빌려 판 뒤 나중에 되사서 갚는 투자기법으로 주가가 내릴수록 수익이 커진다. 이 기업의 주가는 지난해 8월만 해도 주당 4달러대에 머물다 경영진 교체를 호재 삼아 지난달 중순 40달러 안팎까지 뛰었다. 이때 헤지펀드 시트론 리서치가 “게임스톱은 실패한 소매업체” “지금 주식매입자는 포커게임을 모르는 멍청이”라며 공매도에 돌입했다. 일반투자자들이 인터넷 커뮤니티 ‘레딧’의 주식토론방 ‘월스트리트베츠’로 대거 몰려 “공매도 세력에 본때를 보이자”며 주가 떠받치기에 나섰다. 이 게시판에는 “월가의 탐욕이 내 10대 시절을 앗아갔다”는 글들이 빗발치고 400만명 이상의 개미가 결집했다.

한 달 사이 게임스톱의 주가는 무려 1600% 이상 폭등했다. 블룸버그는 “보통 주가를 밀어 올리는 건 ‘탐욕’이지만 게임스톱의 거품에는 ‘분노’가 있다”고 평가했다. 어린 시절 금융위기를 겪었던 미 중산층 자녀들의 좌절과 분노가 집단행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시트론 리서치는 “공매도 보고서 발행을 중단하겠다”며 백기를 들었다. 유명 헤지펀드 멜빈캐피털도 운용자산이 올해 초 125억달러에서 한달 만에 80억달러로 쪼그라든 채 공매도 계약을 종료했다. 헤지펀드의 공매도 관련 손실은 195억5000만달러(약 22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도 모자라 개미군단은 공매도 비중이 큰 AMC엔터테인먼트, 블랙베리 주식과 국제 은시장까지 전선을 확대했고 관련 종목의 시세가 요동쳤다. 헤지펀드가 현금 확보를 위해 주식 처분에 나서자 글로벌증시도 살얼음판이다.

월가에서는 ‘금융권력이 이동했다’ ‘금융 민주화와 탈중앙화가 시작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 의회는 “헤지펀드와 그 금융파트너들이 증시를 어떻게 조작하는지 살펴보자”며 청문회를 열기로 했다. 개인투기세력의 위험한 불장난이라는 반론도 나온다. 기업가치와는 무관하게 천정부지로 치솟은 주가가 유지될 리 만무하다. 투자은행들이 현재 주가로 미래에 팔 권리인 ‘풋옵션’을 사들이며 반격에 나선 것으로 전해진다. 주가 거품은 폭탄 돌리기로 전락해 결국 개미의 손실로 전가될 공산이 크다.

남의 일이 아니다. 국내에서 반공매도 운동이 불붙고 있다. ‘아예 공매도를 없애자’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20만명 이상이 동의했다. 한국주식투자자연합회는 개인주주들과 연대해 공매도 세력과 맞서겠다고 했다. 금융위원회는 1년간 금지했던 공매도 재개 시점을 3월 중순에서 5월 초로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공매도는 선진국들의 금융시장에서 일반적으로 허용하는 제도로, 시장 거품을 덜어내는 역할을 한다. 하락장에서 돈을 벌기도 하지만 주가하락의 손실을 만회하는 안전장치이기도 하다.

헤지펀드와 투자은행이 자본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 똑똑한 개미군단이 신흥세력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제 증시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개미의 불만과 불신을 해소하는 게 급선무다. 금융당국은 공매도 관련 불법행위를 뿌리 뽑고 개인의 공매도 문턱도 확 낮춰야 한다. 시계를 넓혀 금융제도 개선과 개인 대차거래시스템 등 인프라 정비를 통해 기관과 외국인, 개미 간 균형을 맞춰나가는 게 옳다.

주춘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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