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찾아 온 고국에 삶을 짓밟힌 남자
[경향신문]
서울대 유학 1년 만인 1974년
정보부 끌려간 뒤 징역 12년형
수감 중 조현병 증상 발현 고통
재일동포 김승효씨(1950년생·사진)는 일본 리츠메이칸대 3학년이던 1970년 4월 모국 유학생 시험에 합격했다. 재일동포 유학생들이 한국을 찾았다가 간첩으로 몰리는 일이 심심찮게 있던 때였다. 한국 국적의 김씨는 두려움보다 자신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더 컸다. 1973년 4월 서울대 재외국민교육연구소에 입소하고 이듬해 서울대에 입학했다.
불행도 함께 시작됐다. 김씨는 1974년 5월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뒤 기소됐다. “반국가단체 가입 후 북한 공작원에 포섭돼 국내에 잠입, 정부를 비방하고 북괴의 우월성을 찬양·고무·동조했다”는 혐의다. 파기환송심까지 이어진 재판 끝에 징역 12년이 확정됐다.
김씨는 광주교도소에 수감된 1976년부터 조현병(정신분열) 증상을 보였다.
부모가 면회를 갔지만 말도 없고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당시 교도소에서 작성한 문서에는 “하루에도 수차례씩 묵묵히 서 있거나 앉아 있으며 작업도 하는 척하다가 다시 멍하니 서 있어 정상이 아닌 것 같아 주시하고 있던 바, 1977년 5월7일 조식 후 갑자기 병세를 일으켜 실신 상태이기에…”라고 적혀 있다. 1981년 8월15일 가석방되기까지 제대로 된 치료는 받지 못했다.
출소 후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망상과 공포에 시달렸다. 일본으로 가 이듬해 정신병원에 입원했지만 다른 환자들이 자신에게 최면술을 건다고 생각해 힘들어 했다. 2003년 3월 퇴원까지 20년 이상 걸렸다. 2001년 병상 보고서는 김씨를 ‘잔류성 인격변화 상태’라고 기재했다. 조현병 증상이 본래적 속성처럼 인격화돼 호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7부(재판장 박석근)는 지난달 28일 김씨와 형제들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김씨에게 12억여원을 지급하라고 했다. 김씨가 그간 지불한 치료비와 간호비, 위자료 등을 포함한 돈이다. 형제·자매 4명에게도 약 6000만~9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했다.
40년 지나 2018년 재심서 무죄
지난달 국가손배 승소했지만
지난해 작고 ‘너무 늦은 판결’
2018년 9월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되며 국가배상 소송의 길이 열렸다. 쟁점은 조현병과 국가 불법행위의 상관관계를 입증하는 것이었다. 우선 김씨가 한국에 오는 것을 거부했다.
자신을 고문하고 가둔 모국에 공포감을 가졌고, 조현병으로 집밖을 나서는 것도 쉽지 않았다. 전문가가 현지를 찾아 감정을 하기로 했다.
김씨는 체포 전까지 건강상태가 양호했고 정신질환도 없었다. 가족력도 없었다. 일본에서 김씨를 면담한 전문의는 “불법 체포·구금 및 가혹행위가 이뤄진 시기와 조현병 증상 발현 시기 사이에 시간적 밀접도가 높고 이에 따른 스트레스 이외에 조현병 발병 원인이 될 만한 특별한 사정을 찾기 어렵다”고 했다. 그의 상태는 “최고 중증 등급인 1급 1호에 해당된다”고 했다.
재판부는 “(대한민국은) 원고 김승효와 그 가족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피해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채 무려 40년 이상 경과하도록 방치했다”며 김씨 손을 들어줬다. 자신을 가둔 국가로부터 배상을 받게 됐지만, 김씨는 이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는 지난해 12월 향년 70세로 숨졌다. 재판부가 그의 간호를 위해 2034년 8월까지 매월 약 211만원을 지급하라고 한 주문도 소용없는 일이 됐다.
김씨는 생전에 재심과 국가 상대 소송에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판결문을 읽어주고 설명해줘도 여전히 자기 세계 안에 갇혀 과거와 싸우고 있었다. 너무 늦은 판결이었다. 김씨를 대리한 장경욱 변호사는 “조현병과 국가 불법행위의 상관관계가 인정된 건 의미가 있지만 조금 늦은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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