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집 쪽방에 홀로 방치된 다섯살, 정서적 학대였다
대법원 판례 "빈 공간 방치, 정서적 학대"
그간 아동학대로 보지 않던 관행에 제동
"엄마, 나 어린이집에 다녔을 때 무서웠던 기억들이 자꾸 생각 나."
아홉살 A군
아홉 살과 여섯 살 두 아이를 둔 B씨는 최근 첫째 A군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초등학생 3학년인 A군이 기억 속에 묻어뒀던, 아이들 침대만한 크기의 '작은 방'에서 홀로 견뎌야 했던 공포의 시간들에 대한 고백을 뒤늦게 듣고서다. A군은 다섯살이던 2017년 친구들과 떨어져 교재와 도구들로 가득 찬 좁은 공간에서 홀로 낮잠을 자며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순간들을 4년이 지난 지금까지 또렷히 기억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틈도 없이 B씨는 자책해야 했다. 국공립어린이집이라 믿었는데, '학습교구실' '창고'로 불리는 쪽방에 홀로 방치되다시피 한 아이가 A군 뿐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A군이 지금껏 혼자서는 잠자지 못하고, 우울증 완화 약까지 처방받게 된 것을 생각하면 눈물만 앞선다.
"빈 교실 방치는 학대" 대법 판결
대법원이 최근 초등학교에 입학한 만 6세 어린이를 '빈 교실'에 홀로 8분간 방치한 행위는 아동학대로 봐야 한다는 판결을 확정하면서, 정서적 아동학대 피해를 호소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경찰과 아동보호전문기관(아보전)이 그간 빈 교실에 유아를 방치하는 행위를 아동학대로 보지 않았던 관행에 제동이 걸리게 됐기 때문이다.
3일 서울 은평구청 등에 따르면 은평구 구립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겼던 B씨가 최근 어린이집 교사 등이 '정서적 학대'를 가했다며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제기했다.
B씨에 따르면 A군은 어린이집에 다녔을 당시 뚜렛증후군(틱 장애) 증세를 보여 더 세심한 관심이 필요했다. 하지만 A군 담임교사는 A군을 사실상 창고로 쓰이는 쪽방에서 자도록 했다. A군은 그 무렵 뚜렷한 이유 없이 틱 장애가 심해지고, 두통과 불안증을 호소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해당 어린이집은 2019년에도 C군(당시 6세)을 작은 방에 방치했다 아동학대 신고로 조사를 받았지만, 경찰은 관할 아보전 등의 자문을 근거로 들어 처벌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C군은 어린이집을 다니면서부터 불안 증세를 겪으며 "선생님한테 혼났다", "작은 방에서 잤다"는 말을 반복했다. 경찰 조사결과 또 다른 담임교사가 C군을 자료실로 데려가거나 들어가도록 지시하는 장면이 10여차례 확인됐다.
아보전은 "자료실은 양 옆에 물건이 쌓인 방으로, 위험에 대한 인식없이 사용한 것은 부적절한 것으로 판단된다"면서도 "아동이 여러 번 교재교구실에서 잠을 잤고, 스스로 들어가는 모습을 고려했을 때 방임으로 판단할 객관적 근거가 미흡하다"고 판단했다. 검찰도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교사 사과하고 사직했지만…
어린이집은 A군을 자료실에서 재운 것을 인정했다. A군을 담당했던 교사는 부모에게 "그 당시엔 (자료실이) 열린 공간이라 드나들었고, 나쁜 의도로 그곳에서 재운게 아니다"라며 "의도하지 않았지만 상처를 받았다면 아이에게도 사과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울러 해당 어린이집 원장은 "2019년에 문제가 불거진 이후론 자료실을 잠금장치로 걸어두고 사실상 폐쇄한 상태"라며 "지난해 원장이 바뀐 이후 아이들을 사랑으로 보살피고 있는데, 뒤늦게 이런 일이 발생해서 마음 아프다"고 밝혔다. A군을 가르친 교사는 지난달 31일 사직했고, C군의 담임교사도 사직을 예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아동을 빈 공간에 방치한 것은 정서적 학대에 해당한다고 입을 모은다. 공혜정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대표는 "어떤 이유일지라도 아동을 공포스럽고 불결한 장소에 방치하면 안 된다는 게 대법원 판례"라며 "아동이 원했더라도 혼자 뒀다면 학대에 해당한다"고 비판했다.
대법원은 최근 초등학교 1학년생을 빈 교실에 8분간 홀로 방치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한 초등학교 교사에게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학생들이 빈 교실을 무서운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는 점, 훈육에 따른 격리 조치도 '교실 내 격리'를 의미하는 점을 들어 빈 교실에 방치한 것을 정서적 학대 행위라고 판단했다.
관할 구청은 A군 사건과 관련해 학부모가 문제를 제기할 때까지 문제점을 인지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됐다. 관할구청 측은 "학부모의 신고전화나 교직원의 신고전화가 없다면 정기점검을 통해서는 불미스러운 일을 알기 어렵다"고 한계를 인정했다.
윤한슬 기자 1seul@hankookilbo.com
이정원 기자 hanak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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