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 문학이 만나면?..경계를 넘은 풍성한 예술적 교감
[경향신문]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전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4일 덕수궁서 개막
·근현대시기 문학인·미술인들의 다양한 교류 조명
·김환기 ‘자화상’ 등 첫 공개…회화, 시집 등 640여점 출품
# 1-1955년 1월. 일본에 있는 가족과 다시 만날 날을 꿈꾸던 이중섭은 개인전이 경제적 실패로 돌아가자 가족과의 재회를 포기할 정도로 절망에 빠진다. 거처마저도 마땅 찮았다. 정신적·육체적으로 고단하던 때, 그래도 든든한 버팀목은 오랜 친구인 시인 구상이었다. 작품 ‘시인 구상의 가족’은 그가 구상의 왜관 집에 머물 때 그린 것이다. 구상이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 태워주는 모습을 몹시 부러워했을 이중섭은 화면 한 쪽에 연약한 자신의 옆 모습을 그려 넣었다.
# 2-1934년, 시인 이상은 서울 종로에 다방 ‘제비’를 열었다. ‘살롱 문화’를 낳은 프랑스 파리의 살롱들처럼 제비 다방은 당대 문화예술인의 사랑방이 됐다. 벽에는 이상의 절친 구본웅의 작품 등 화가들의 그림이 걸렸고, 문학인과 미술인·음악인 등 예술가들은 하나로 어우러졌다. 구본웅의 ‘친구의 초상’은 당시 이상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 3-1941년 봄,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는 잡지 <문장>의 편집 실무자였던 조풍연의 결혼식이 열렸다. 가난한 화가들이 마련한 선물은 각자의 그림을 엮은 두툼한 화첩이다. 김환기를 비롯해 길진섭·김용준·김규택·정현웅·윤희순·이승만 등의 작품이 실린 <조풍연 결혼 축하 화첩>이 바로 그것이다.
격동의 근현대 시기, 글을 짓는 문학인과 그림을 그리는 미술인들은 글과 그림의 경계를 훌쩍 넘어 뜨거운 교감을 나눴다. 문자와 이미지라는 표현방식은 달랐지만, 그들은 그 누구보다 시대와 삶을 예민하게 감각하는 예술가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은 지적 연대감 속에 서로의 예술혼을 자극시키고, 영감을 주고받으며 당대의 문화예술을 보다 풍성하게 가꿔낸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올해 첫 기획전으로 마련, 4일 덕수궁관에서 개막하는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는 1930~1950년대 전후 미술과 문학이 만난 문화예술계 풍경을 흥미롭게 그려낸다.
미술과 문학을 씨줄과 날줄로 삼아 미술인과 문학인들의 끈끈한 교류, 나아가 그들이 남긴 다채롭고 풍성한 글과 그림 등 예술적 성과물을 조명하는 것이다. 전시장에는 새로 발굴한 자료를 포함해 무려 600여 점이 넘는 전시품이 나왔다. 예술인들의 개인적 교류와 관계는 물론 그들의 정신적·예술적 교감의 상징물이기도 한 작품들이다. 회화 140여 점을 비롯해 시집과 잡지 원본 등 희귀한 서지 자료 200여 점, 관련된 각종 시각자료 300여 점 등이다.
특히 이번 전시는 전시를 준비하며 발굴한 새로운 자료 등 처음 공개되거나 평소 접하기 힘든 작품들을 많이 선보여 더욱 주목하게 만든다. 일반 전시를 통해 최초로 선보이는 김환기의 ‘자화상’과 ‘무제’를 비롯해 최재덕의 ‘한강의 포플라 나무’, 한묵의 ‘검은 생선’, 이승만의 ‘박종화의 금삼의 피 삽화’, 이여성의 ‘사계산수도’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국민화가’로 불리는 김환기의 ‘자화상’(연대 미상)은 그의 사위이자 단색화 등으로 국제적 주목을 받는 고 윤형근의 유족 소장품으로 이번 전시에 출품됐다.
전시기획자인 국립현대미술관 김인혜 팀장은 “문인과 화가들이 따로 또 같이 추구했던 지적 탐색, 미적 향유의 가치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는 당대의 입체적 관계도를 그리고자 기획한 전시”라며 “근현대 미술사적으로는 물론 많은 관람객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새로운 작품, 자료들이 발굴되는 성과도 얻었다”고 밝혔다.
전시는 모두 4개 전시실에 4부로 구성됐다. 먼저 ‘전위와 융합’이란 소주제의 제1 전시실은 이상의 ‘제비’다방을 둘러싼 예술가들의 교류, 국제적 흐름을 인식하며 전위적으로 나선 작가들의 새로운 예술적 시도 등을 살펴본다. 이상과 박태원·김기림 등의 문인과 화가 구본웅·황술조·길진섭·김환기·유영국·김병기 등이 등장한다. 야수파·초현실주의·다다이즘·추상 등에 관심을 기울인 화가들의 작업이 주목된다.
이어 이른바 ‘인쇄 미술’ ‘지상(紙上)의 미술전’ ‘화문(畵文)’이다. 당대 문학인의 글, 미술인의 그림이 활발하게 어우러진 곳은 신문과 잡지였다. 유명 문학인과 미술인의 협업인 신문 소설과 삽화, 시화 등은 큰 인기를 누렸다. 시와 그림의 조화가 돋보이는 공간이자,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수많은 다양한 이미지들이 눈길을 잡는다. 전시장은 마치 도서관 검색대처럼 꾸며져 각 전시대에서 출품작을 감상할 수 있다. 안석영과 노수현·이상범·정현웅·이승만·김규택 등의 삽화는 물론 백석의 유일한 시집 <사슴>, 김소월의 <진달래꽃>,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등의 원본을 만난다.
제3 전시실은 유난히 각별한 관계를 유지한 문학인·미술인들의 공간이다. 정지용과 장발, 백석과 정현웅, 김기림과 이여성, 이태준과 김용준 등의 작품과 관계를 살펴본다. 이중섭의 ‘시인 구상의 가족’, 김용준의 ‘이태준 초상’, 백석의 시와 정현웅의 삽화, 최재덕의 ‘한강의 포플라 나무’ 등으로 구성됐다.
마지막 전시실은 ‘화가의 글·그림’이라는 소주제다. 에세이집 <강가의 아뜰리에>로 유명한 장욱진은 물론 한묵, 박고석, 천경자, 김환기 등 화가이면서 문학적 성취로도 이름난 작가들의 회화와 문학작품들이 전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김용준의 ‘기명절지 10폭 병풍’, 장욱진의 ‘사람’, 천경자의 ‘정원’, 박고석의 ‘나무’, 김환기의 ‘무제’와 고향을 그리워하며 파리에서 그린 소품 ‘소반’ 등을 만날 수 있다.
문학과 미술, 음악 등 경계를 넘어선 예술가들의 예술적 교류는 역사적으로 시공을 초월해 치열하고도 끈끈하게 이어져왔다. 물론 지금도 계속되면서 이 시대 문화를 다채롭게 그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윤범모 관장은 “이번 전시는 새로운 시대를 꿈꾸며 도전했던 근대기 미술인·문학인들이 함께 만들어낸 소중한 자산을 발굴·소개한다”며 “비록 가난하고 모순으로 가득찬 시대 속에서도 정신적으로 누구보다 풍요로웠던 예술가들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고 밝혔다. 김인혜 큐레이터는 “미술품 중심의 기존 전시와 달리 시집·잡지 등 서지 자료들도 많다보니 보다 시간적 여유를 갖고, 꼼꼼한 감상이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전시는 5월 30일까지.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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