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아나키스트 화폐에서 월가 투자자산으로
2009년 사이퍼펑크, 비트코인 채굴
2020년 월가 새 투자자산으로 부상
비트코인은 무정부주의(아나키즘) 화폐라고도 불린다. 국가나 정부에 귀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폐쇄하지 않는 이상 어떤 정부도 비트코인 발행을 막을 수 없다. 정부의 발권 독점과 통제에서 벗어난 민간화폐인 것이다.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화폐의 탈국가화’와도 맥이 닿아 있다.
실제 비트코인을 만든 사람들은 사이퍼펑크(Cypherpunk)였다. 암호화를 의미하는 사이퍼(Cypher)와 저항(punk)을 합친 단어로, 컴퓨터와 암호기술로 정부의 검열과 통제에 저항하는 자유주의 운동이었다. 이들이 암호학을 활용한 화폐인 비트코인을 만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이퍼펑크의 전설로 불리는 프로그래머 고 티머시 메이는 1988년 ‘암호화 무정부주의자 선언’을 통해 “컴퓨터 기술은 곧 개인과 집단이 완전한 익명으로 서로 소통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며 “거래 내용이나 행위 데이터를 변경·조작하려는 어떠한 간섭이나 시도도 막아낼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사이퍼펑크 정신은 탈중앙화를 통해 외부의 통제나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비트코인의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비트코인 가격이 오르자, 월가의 금융기관들은 새로운 투자자산으로 바라보고 접근하기 시작했다. 자유주의자를 위한 화폐인 비트코인이 전통 금융권의 금융자산으로 전환되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 금융위기 속 탄생
비트코인의 탄생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떼고 설명하기 힘들다. 탐욕으로 시작된 미국 부동산 버블은 2007년 4월 미국 2위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 회사 뉴센추리파이낸셜(NEWC)의 파산으로 이어졌다. 그로부터 1년 반 뒤인 2008년 9월 158년 역사의 미국 4위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면서 금융위기가 본격화됐다.
2008년 금융위기는 대출을 받은 기업이나 대출자가 돈을 갚지 못해서 파산한 게 아니라, 대출해준 금융기관들의 돈줄이 막혀 파산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달랐다. 그동안 ‘불패 신화’를 쓴 은행이 연이어 파산하면서 기존의 자본주의, 금융기관을 더 이상 가만히 지켜봐서는 안 된다는 자성이 나왔다.
2008년 10월31일 ‘비트코인: P2P 전자화폐 시스템’이라는 아홉장짜리 논문이 세상에 공개됐다. 논문의 요지는 금융기관이나 중앙 집중형 통제 없이 전자화폐를 발행해 사용이 가능하다는 주장이었다. 이 논문을 쓴 익명의 저자 ‘사토시 나카모토’는 2009년 1월3일 논문의 주장을 실현한 결과물을 공개했다. 개인 누구나 발행하고 아무런 통제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암호화폐 ‘비트코인’이 세상에 탄생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사토시 나카모토는 비트코인 블록체인의 첫번째 제네시스 블록에 문구 하나를 남겼다. ‘재무장관, 은행에 두번째 구제금융 임박’.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의 2009년 1월3일 기사 제목으로, 글로벌 금융위기로 어려움을 겪는 은행을 구제하기 위해 영국 정부가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사토시 나카모토는 비트코인의 탄생 배경에 금융위기를 야기한 정부와 금융권이 있다는 걸 명확히 밝힌 것이다.
■ 비트코인의 네가지 특성
사이퍼펑크 정신은 비트코인의 기술적 특성에 그대로 담겨 있다. 첫번째는 탈중앙성이다. 비트코인은 정부나 금융기관 같은 중앙에서 통제하는 장치가 없다. 바꿔 말하면, 컴퓨터와 인터넷만 있으면 누구나 비트코인을 발행할 수 있다. 이걸 ‘채굴한다’고 표현한다.
두번째 특성은 위·변조 불가성이다. 비트코인은 한번 기록된 내용은 지우거나 변경할 수 없다. 컴퓨터에 저장한 파일이나 이미지는 수정이 가능하다. 하지만 비트코인은 여러명이 나눠 저장하는 블록체인 특성상 한번 기록하면 내용 수정이 불가능하다. 비트코인에 기록된 내용은 항상 원본인 셈이다.
이는 세번째 특성인 이중지불 불가성으로 이어진다. 이중지불은 같은 화폐를 여러곳에서 중복해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흔히 사진과 같은 디지털 파일은 복사본을 만들어 유통하기 쉽다. 하지만 화폐가 복사돼 돌아다니면 가치가 보장되지 않는다. 원본만 존재하는 비트코인은 이중지불이 불가능해 가치저장 수단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마지막은 투명성이다. 보내고 받는 이의 이름이 공개되진 않지만, 비트코인을 주고받은 거래 내역은 온라인에 공개돼 누구나 검색해 찾아볼 수 있다. 비트코인을 받고 성착취 동영상이나 마약을 판매한 웰컴투비디오나 엔(n)번방, 박사방 같은 범죄를 추적할 수 있었던 건 이 특성 덕분이다.
■ 비트코인 사들이는 월가
처음에 월가는 비트코인을 ‘쓸모없는 쓰레기’ 정도로 봤다. 미국 투자은행 제이피(JP)모건의 제이미 다이먼 최고경영자는 2017년 “비트코인은 사기”라고 했다. 최근까지도 골드만삭스는 투자 설명회에서 “비트코인은 자산이 아니다”라며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냈다.
하지만 비트코인 가격이 오르며, 가치저장 수단으로 관심을 받자 이들의 인식은 많이 달라졌다. 글로벌 신용평가사인 에스앤피(S&P)는 올 1월 “전통 투자자의 비트코인 투자가 늘 것”이라고 예측했다. 실제 월가의 유명 헤지펀드 매니저 폴 튜더 존스, 스탠리 드러큰밀러를 비롯해 매스뮤추얼, 마이크로스트레티지 같은 기업이 공개적으로 비트코인을 사 모으고 있다. 처음에는 부정적이었던 월가가 무서운 기세로 비트코인에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비트코인이 제도권에 편입될수록 사이퍼펑크의 이상과는 멀어지고 있다. 특히 정부와 기관투자자는 전통 금융권 수준의 자금세탁 방지 기준을 비트코인에도 요구하고 있다. 미국 재무부가 사실상 주도하는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는 2019년 암호화폐 송금 시 송금인·수취인 신원을 확인해야 하는 트래블룰(자금이동규칙) 지침을 발표했다. 정부의 검열과 통제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로운 송금 수단을 꿈꿨던 비트코인의 취지가 퇴색되고 있다.
티머시 메이는 “우리가 비트코인에 열광한 이유는 거래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권력을 우회하고 무력화해, 개인이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라며 “비트코인을 페이팔이나 비자카드의 아류로 만들고 싶지 않으면, 규제의 틀에 맞추려는 시도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 흐름만 보면, 투자자들은 사이퍼펑크의 아나키즘 화폐보다 검열과 통제가 있지만 달콤한 가격 상승이 있는 월가의 투자자산을 더 선호하는 것 같다.
박근모 코인데스크코리아 기자 mo@coindesk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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