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처분 방역 도마에.."멀쩡한 계란 80만개 팔지도 못해요"
"지형·교통·철새 고려없이
무조건 거리로 살처분하라니"
행정심판으로 살처분 막아도
멀쩡한 계란 80만개 썩어가
합리적 살처분 기준 안만들면
가금류 농가 피해 연례행사
◆ AI 살처분 논란 ◆
지난 2일 오전 경기 화성시 향남읍 산안마을농장. 관리인 유재호 씨(39)가 긴 한숨을 내쉬며 정부의 무분별한 살처분 정책을 맹비난했다. 농장 주변은 '무고한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내용의 현수막이 내걸린 상태였다. 이곳은 지난해 말 1.8㎞ 떨어진 다른 농장에서 조류인플루엔자(AI)가 확진되자 화성시로부터 살처분 명령을 받았다.
살처분을 거부하던 이 농장은 올 초 '반경 500m~3㎞는 살처분 및 반출입 금지 조치를 하되 지방 가축방역심의회 결과에 따라 살처분 범위 조정이 가능하다'는 조항을 근거로 행정심판을 청구해 가까스로 집행정지 처분을 받아냈다. 하지만 살처분 명령이 적합한지에 대한 최종 판단은 3월은 돼야 나올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반출입이 제한되고 있다 보니 하루 2만개가량의 계란이 창고에 쌓이고 있다. 현재 재고만 80만개가 넘는다. 시중에 판매되는 계란의 유통기한은 보통 45일이다. 냉장 보관 시 더 연장될 수 있지만 상품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유씨는 "이러다간 계란을 모두 폐기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면서 "가격 안정화를 위해 계란을 수입하는데 정작 창고에는 계란이 쌓여있다"고 허탈해했다.
매일같이 화성시에서 농장을 방문해 AI 간이검사를 하고 있지만 결과는 매번 '음성'이다. 그럼에도 일률적인 방역조치로 농가는 점차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유씨는 "방역지침상 살처분 범위를 조정할 수 있음에도 행정편의 등을 이유로 무조건 살처분하는 게 현실"이라며 "많은 농가들이 강압적인 정책에 피해를 보고 가축도 맥없이 죽어나가고 있다"고 꼬집었다.
40년 넘게 닭 연구에 매진하며 국립축산과학원장으로 일했던 이상진 계란연구회장(65)도 정부의 '3㎞ 살처분'이 지나치게 행정편의적이라고 비판한다. 이 회장은 "AI가 터진 농장과 큰 산으로 가로막혀 있거나 철새가 잘 오지 않는 동네에 위치한 농장이라도 일방적으로 3㎞ 기준을 내세워 살처분이 벌어지고 있다"며 "지형지물을 고려하는 등 전문가들의 의견을 반영해 더 세밀하게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확산세가 만연해진 AI 차단을 위해선 불가피한 조치이며 당장 기준을 바꿀 상황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급등한 물가는 일단 수입산을 들여와 막아보겠다는 입장이다. 기획재정부는 3일 2월 말까지 계란 2400만개를 추가로 수입해 공급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이미 발표한 설 전 수입물량 2000만개를 뛰어넘는 수준이다. 하지만 경직된 기준으로 살처분을 벌이는 가운데 신선란을 수입하는 것은 소비자를 우롱한 것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이 회장은 "전란액 등 식품 가공을 위한 가공용 계란 수입은 필요하지만 식용 신선란을 수입하는 것은 시장에 더 혼란을 준다"고 비판했다. 살처분을 줄이고 계란 공급을 유지하려는 노력 없이 생산이력 관리가 부실한 미국산 계란을 들여온다는 것이다.
[화성 = 이상헌 기자 / 송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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