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류 풀었지만, 당장 돌아올 수가 없다?
이란 외교부에서 한국 선적 석유화학제품 운반선 한국케미호 선원들에 대해 억류를 푼다고 전격 발표했습니다. 이란 혁명수비대에 나포된 게 지난달 4일이었으니까 거의 한 달 만입니다.
그동안 이란 쪽에선 환경오염 행위에 대한 사법 절차가 진행될 거라고 했지만, 환경오염에 대한 구체적인 혐의를 적시하지도, 증거를 내놓은 적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한국에 동결된 7조 원이 넘는 동결자금에 대한 이란의 불만이 억류의 배경이라는 관측이 무성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동결자금 관련한 큰 진전이 없는 가운데 갑작스럽게 선원들을 풀어주겠다고 한 겁니다.
■ "억류 해제"…단, 배와 선장은 남겨라?
사이드 하티브자데 이란 외무부 대변인은 어제(2일) "억류된 한국 선원들이 한국 정부의 요청과 인도주의적 조처에 따라 출국 허가를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한국 외교부도 어젯밤 늦게 보도자료를 내고 최종건 1차관이 아락치 이란 외교부 차관과 통화했다면서 "아락치 차관은 이란 정부가 선장을 제외한 나머지 선원들에 대한 억류를 우선 해제하기로 결정했음을 알려왔다"라고 전했습니다.
이란 측에서 선원들을 풀어주기로 먼저 결정한 뒤 한국 측에 통보해왔다는 겁니다.
하지만 상황은 애매합니다. 이란 정부가 출국을 허락했다지만 선원 19명이 한꺼번에 귀국길에 오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케미 호는 배수량 만 톤에 육박하는 큰 선박입니다. 선사 측 설명을 들어보면, 선박을 유지하고 위급 상황에 대비하는 데 필요한 최소 13명이 필요합니다.
억류 생활이 길었던 만큼 일부 선원을 교체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지만, 코로나19 감염 우려 등을 고려하면 그마저도 여의치 않습니다.
이 때문에 외교부도 "선박 및 화물의 유지 관리 필요성 등을 감안, 억류 해제되는 선원들의 인수와 귀국을 포함한 이동에 관해서는 선사 측과도 협의 중"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외교부 당국자는 "과거 사례를 찾아보니 2019년 (나포됐던) 영국 배 같은 경우 선원 23명이 있었는데 비필수 인력 7명이 먼저 억류 해제된 사례가 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결국, 이란에서는 '인도주의적 억류 해제'를 과시하는데, 실질적으로는 선원들 상당수가 이란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셈입니다.
게다가 선원들의 국적은 미얀마 11명, 베트남 2명, 인도네시아 2명 등으로 다양합니다. 이들 선원들을 상대로 귀국 의사가 있는지 파악하고, 귀국하겠다면 어떤 경로를 밟아 귀국시킬지 등을 정리해야 합니다. 특히 가장 많은 선원들의 출신국인 미얀마에서는 최근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고 공항이 폐쇄돼, 당장 미얀마에 돌아가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선박도 여전히 이란 항구에 묶여 있습니다. 외교 소식통은 한국케미호에는 이란 혁명수비대원 10여 명이 매일 교대로 올라 경계 근무를 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란 쪽 논리로는 환경오염 행위의 증거이자 환경오염 정화비용 처리를 위한 '담보'가 될 수 있습니다. 아직은 이렇다 할 결론을 내지 못한 한국과의 동결자금 협상에 지렛대로 활용할 가능성도 보입니다.
■ 핵심은 동결자금..."한국의 진정성 확인"
선박 억류와는 직접 관련이 없다는 게 한국과 이란 양쪽 정부의 '공식' 입장입니다만 이 문제가 두 나라 사이의 가장 중요한 현안임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미국의 제재로 한국에 동결된 이란 석유수출 대금, 약 70억 달러(약 7조8,000억 원) 이야기입니다.
이란에서는 그동안 이 돈을 쓸 수 없도록 한국이 부당하게 묶고 있다며 강하게 불만을 표시해 왔는데요. 의미 있는 진전이 있다는 게 외교부 설명입니다.
외교부 당국자는 오늘 기자들과 만나 "이란의 유엔 분담금 문제는 거의 해결됐다"고 확인했습니다. 이란은 현재 유엔 분담금 1,625만 달러(약 180억 원)를 내지 못해서 투표권이 정지된 상태입니다. 이 가운데 일부를 한국에 묶여 있는 원화 자금으로 납부해 투표권부터 되살리는 방안을 놓고 한국과 이란, 미국 등이 협의해왔습니다.
특히 이란은 송금 과정에서 미국 은행을 거칠 경우, 이 자금이 다시 동결될 가능성을 크게 우려해왔습니다. "유엔은 회비 송금 과정에서 미국 은행을 중계 금융기관으로 쓰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고집해왔는데, 묘수를 찾았다는 겁니다.
또 이란의 코로나 백신 공동 구매·배분을 위한 국제 프로젝트 ‘코백스 퍼실리티’ 참여 비용을 동결자금으로 납부한 사실도 확인됐습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 자금이 "터키를 통해 이미 송금됐다"고 밝혔습니다.
이란 측에 수출하는 한국의 의약품·의약기구 수출규모도 지난해 5월~11월 130억 원에서, 지난해 12월~올해 1월까지 256억 원으로 크게 늘었는데, 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의 '진정성'을 이란이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아직은 전체 자금 규모에 비하면 액수는 적은 편이지만 한국의 노력을 이란 측에서 인정했다는 게 중요해 보입니다.
■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결국 열쇠는 미국에?
당장은 선원들을 풀어주겠다는 말만 있지 구체적으로 언제 몇 명이 귀국길에 오를지 불투명합니다. 선박과 화물 유지 관리에 필수적인 인력들은 당장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결국 자금 동결 문제를 풀 열쇠는 미국이 쥐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과거 트럼프 행정부 시절 미국이 일방적으로 이란과의 핵합의를 탈퇴하고 대이란 제재를 강화하면서 시작됐습니다. 바이든 행정부 외교 라인이 정비된 뒤에도, 지난 정부 정책을 리뷰하고, 새로 입장을 정리하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겁니다.
선원 억류 해제 통보는 의미 있는 진전으로 평가할 만하지만, 결국은 선장과 선원 전원이 가족들 곁으로 돌아오는 게 최종 해결입니다.
범기영 기자 (bum710@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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