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을 깨도 문화를 섞어도..디자인의 세계에선 '美'가 절대가치"

2021. 2. 3.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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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회사 지랩, '와온' '누와' 등 독채스테이 설계
손에 닿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디자인 숨결
아름다움 미적 가치 위해 비효율·관습도 수용
전통가옥의 서까래와 기둥이 그대로 남아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새로 만든 것이다. 기존 목재가 부식이 심해 유지가 힘들다고 판단될 때는 기존의 것을 본떠서 만든다. [이민경 기자]
이곳의 지붕은 원래의 서까래와 지주목을 그대로 남겨놓은 상태. 다만 디자이너의 판단으로 좀 더 어둡고 짙은 색이 잘 어울린다고 보고 색을 덧칠했다. [이민경 기자]

[헤럴드경제(제주)=이민경 기자] 건축주가 땅과 건물을 맡기면 건축가와 디자이너그룹은 손에 닿는 모든 것, 그리고 볼 수 있는 모든 곳을 의도를 갖고 재단해냈다. 단순하면서도 토속적인 공간은 모서리 한 곳, 벽 한 면, 장식품 한 점까지 모두 계획적으로 디자인돼 눈을 즐겁게 했다.

지난달 18일부터 사흘에 걸쳐 토털디자인회사 지랩(Z_Lab)이 설계·시공하고 디자인한 제주도 ‘와온’과 ‘조천마실’, 그리고 서울 서촌의 ‘누와’ ‘한옥에세이’ ‘일독일박’ 등을 탐방해 그곳의 디자인을 살펴봤다.

일부러 욕조 높이보다 넘치게 물을 받는다. 물이 조금씩 흘러나오면서 바깥의 돌바닥을 적시는 모습이 예쁘기 때문이다. [이민경 기자]

가장 먼저 방문한 와온은 ‘스파’와 ‘테라피’가 주제다. 두 동짜리 제주 가옥을 고쳐서 하나는 숙박동, 하나는 큰 스파와 사우나가 있는 테라피동으로 쓴다. 입실시간에 맞춰 수영장만 한 욕조는 김이 모락모락 나게 데워졌다. 물이 계속 흘러넘쳐 바닥의 현무암을 물들였다.

“왜 물을 이만큼이나 받나요? 넘치고 있는데….” 현장 매니저에게 물었다.

“보기에, 시각적으로, 사진 찍었을 때 예뻐서요. 일부러 넘치게 둡니다.”

넘쳐난 욕조물에 반쯤 잠긴 현무암 돌멩이. [이민경 기자]

이곳에선 ‘미(美)’가 최우선 가치였다. 처음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 강력했다. 어떤 비효율도, 난처함도, 생경함도 ‘여기엔 이게 가장 잘 어울리니까’ ‘아름다운 것은 남겨야 하니까’라는 이유로 설명이 됐다.

모든 조명이 매립등과 스탠드 같은 간접등으로 설치됐다. 좀 어둡지 않냐는 질문엔 “디자인 세계에서 간접등은 불문율”이라며 “일반집에서 쓰는 LED등이 설치됐다고 생각해보세요”라는 현답이 나왔다.

정해진 룰에 군말 없이 따르게 됐다. 실내에서는 짚신을, 바깥 정원에선 갈색 슬리퍼를 신어야 한다.

은은한 빛을 내는 간접등을 사용한다. 다소 어둡게 느껴지나 디자이너의 본래 의도인 안락함과 휴식에는 잘 어울린다. [이민경 기자]

두 번째 방문한 조천마실은 200년 된 제주 전통가옥을 최대한 살려낸, 큼지막한 ‘스테이’다. 스테이는 고급 호텔의 쾌적함을 제공하지만 한정된 소수 인원만 받는 독채 형식의 숙박업소를 말한다.

안거리와 밖거리 사이에 있는 옛 부엌(정재)동.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곳이 부엌이었음을 말해주는 가마솥 3종과 이질적인 편백나무 욕조가 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이민경 기자]

이곳은 비교적 최근까지 집주인인 제주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조천마실의 시그니처는 옛 제주도 부엌인 ‘정재’를 편백나무 욕조가 있는 노천탕으로 바꿔낸 것이다. 위로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서 아래로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경험을 팔기에 제격이라고 간파했던 것일까.

실제로 음식 조리에 쓰이던 가마솥 소·중·대. 불을 지피던 아궁이는 자갈을 채워 보이지 않는 상태다. [이민경 기자]

정재는 안거리(부모가 사는 동), 밖거리(결혼한 아들 내외가 사는 동) 가운데에 독립된 건물로 나와 있다. 아직도 할머니가 쓰시던 ‘소·중·대’ 세 사이즈의 가마솥이 한쪽 구석을 지키고 있다. 불을 다루던 부엌인 만큼 돌로 쌓은 벽엔 환기창이 여럿 뚫려 있다. 이 안에 놓인 히노키탕은 제주 전통부엌과 묘하게 어우러진다.

불을 쓰던 부엌이라 벽 곳곳에 환기창이 뚫려 있다. 위로는 차가운 겨울 바람을 맞으며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는 노천탕이 됐다. [이민경 기자]

안거리로 들어가면 커다란 빌트인 장과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200년 된 가구와 마루를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보수했다. 떼어낼 수도 없는 200년 묵은 나무장농 내부를 고치기 위해 성인 남성이 비좁게 머리를 집어넣고 일일이 합판을 붙였다. 마룻바닥은 번호 스티커를 붙여 해체했다가 보일러 공사를 마치고 원래 있던 순서 그대로 덮었다고 한다.

벽면에 ‘빌트인’ 돼있는 제주 전통 장농. 200년 된 이 장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비좁은 공간에 기어들어가 합판 공사를 하는 수고로움이 쓰였다.
마루도 그대로 살렸다. 갈라지고 들떠도 옛것 그대로가 주는 멋을 포기할 수 없었다고 한다.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걱거리지만 그게 운치 아닐까. [이민경 기자]

이 집의 변신 단계를 곁에서 지켜본 이는 “옛것이 남아 있지 않은데 신재(新材)로 옛것을 흉내내는 것은 티가 난다”며 “그뿐만 아니라 조금만 지나면 또 다른 사람이 쉽게 따라 해 생겨나기 마련”이라고 짚어냈다.

한편 이곳의 커튼은 삼베로 만들었다. 삼베는 우리나라에서 수의로 주로 쓰이고 있는 직물이다. 그런데도 디자이너가 새로운 시도를 했다. 실제로 삼베란 걸 알기 전까지는 선입견 없이 그저 ‘킨포크(kinfolk·자연 속의 소박한 느낌)스러운 것이 집의 전체적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고만 생각했다.

삼베로 만든 커튼이 처진 모습. 삼베는 수의로 쓰이고 있어 다소 꺼릴 법하나 디자인의 세계에선 잘 어울리고 예쁘면 그만이다. [이민경 기자]

공간을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라면 관습을 깨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공간을 옮겨보자. 서울 서촌에 있는 7평짜리 자그마한 스테이 ‘누와’는 벽면과 천장, 바닥재가 모두 동일하다. 종이벽지나 타일은 한장 한장 붙임에 따라 길고 짧은 ‘라인’이 생긴다. 좁은 공간을 그처럼 난잡한 선들로 채우는 것은 디자이너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어떤 이음새도 없이 만들기 위해 ‘마이크로토핑’이라는 소재를 선택했다. 상업공간에서 쓰이는 방식을 숙박공간에 적용한 것이다.

처음부터 ‘한 사람이 몰래 숨어들어 안식을 취하는 공간’이란 콘셉트를 갖고 설계와 디자인이 이뤄졌다. 작은 공간을 최대한 넓어 보이게 만들기 위해 이음새를 최소화했다. [이민경 기자]

누와의 로고는 인왕산의 능선을 본떴다. 조천마실의 로고는 글씨가 마실이라도 갈 듯이 ‘길~게’ 늘어졌다. 스테이마다 비치돼 있는 향은 지랩이 계약을 맺은 조향사가 각각의 특색에 맞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식기류인 밥그릇은 국그릇 속에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쏙 들어가도록 만들어 놓았다.

식기류 역시 전문가에게 맡겨져 디자인됐다. 깊은 색의 옹기와 같은 식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건축주의 의견이 받아들여진 케이스. 국그릇 안에 밥그릇이 쏙 들어간다.[이민경 기자]
7평짜리 서촌 누와의 로고. 인왕산의 능선을 모티브로 삼았다. 누하동 골목길에 있는 이 집은 입구를 가리키는 표지판도 없지만 ‘왠지 여기일 것 같다’는 느낌을 믿고 들어가다 보면 마주하게 된다. [이민경 기자]
'브랜딩'이란 로고의 글자 하나하나도 디자인의 완성을 위해 함께 애쓰는 것. 마실(산책) 가듯 길게 늘어진 글자가 아이코닉하다. [이민경 기자]

책과 독서를 주제로 만든 서촌의 ‘일독일박’에는 작은 정원이 하나 있다. 그곳에는 디자이너가 직접 공수해 심어놓은 자작나무가 한 그루 심겨 있다. 자작나무의 껍질은 하얗게 종이처럼 벗겨진다. 이 곳의 테마에 맞춰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이다.

실제로 지랩의 대표와 디자이너들은 공간을 토털디자인할 때 다섯 가지 요소를 잘 챙겼는지 되짚는다. 재료의 질감, 조명의 조도, 상(象), 공간의 온도, 배치에서 느껴지는 감각 다섯 가지다. 이 모든 게 제대로 갖춰져야 공간에 첫발을 들여놓은 손님이 아우라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믿는다.

오감 중 가장 효과가 빠르게 작용하는 것은 후각이다. 각각의 장소마다 특색에 맞춰 조향된 향이 비치돼 있다. 아로마와 함께 비로소 일상의 긴장을 내려놓고 공간이 내뿜는 아우라에 녹아들 수 있다. [이민경 기자]

공간의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자연적인 요소로는 그동안 물을 즐겨 썼다. 어느 스테이를 가나 깊고 독특한 욕조가 설계돼 있었다. 이제는 불이라는 좀 더 모험적인 요소를 쓰기 시작했다. 비교적 최근 개장한 서촌의 ‘한옥에세이’는 실내에서 난로에 불을 피우고 재즈를 들으며 ‘불멍(불을 보고 멍하니 있는 일)’할 수 있다.

공간마다의 아우라에 맞춰 룸웨어도 디자인을 달리한다. 처음으로 불을 주제로 잡은 ‘한옥에세이’는 검은색과 짙은 고동색을 썼다. 룸웨어도 톤앤매너에 맞게 제작됐다. [이민경 기자]

전통한옥을 리모델링한 목조건물은 화재에 취약하다. 때문에 디자이너가 불을 테마로 써보자고 먼저 제안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때는 건축주의 의지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목조주택에 불을 지피는 일은 자칫 화재를 일으킬 수 있어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이럴땐 건축주의 과감한 승낙이 디자이너에게 힘이 된다고 한다. [이민경 기자]

그럼 보통의 디자인 과정에서 건축주의 취향은 얼마나 반영될까. 박중현 지랩 대표는 “땅과 건물이란 부동산을 내놓은 건축주 입장에선 충분히 개인적인 취향을 담아내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다”면서 “하지만 건축주의 사견이 들어가지 않는 편이 그동안의 경험에 비춰 더 좋은 결과가 나온 것이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thin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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