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착취 고발 이유로 징계받은 교사, '장학사의 2차 가해' 밝힌 까닭
사실적시 명예훼손 공소기각에도
경북도교육청, 징계 철회 안 해
2019년 어느 봄날, 창밖으로 어둠이 짙게 깔렸다. 해가 진 후의 학교는 한낮의 소란스러운 기억 때문인지 유난히 더 적막했다. 텅 빈 학교에 남은 서지혜(가명·40)씨는 맞은 편의 장학사와 단 둘뿐이라는 생각이 들자 왈칵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손끝이 떨렸다. 왜 피해자인 자신이 이런 상황에 놓여야 하는 걸까. 경북도교육청의 곽모 장학사는 고압적인 태도로 말을 이었다. "선생님, 그럼 '징계 절차에 전혀 이의가 없다'는 내용으로 각서를 쓰세요."
경북지역에서 교사로 일하는 서씨가 겪은 일은 이렇다. 정신과 의사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하고, 용기내어 가해자를 폭로했으며, 이에 검찰이 사실적시 명예훼손 등으로 기소했고, 교육청은 징계를 내렸다. 교육청이 많은 항의를 받자, 곽 장학사가 서씨를 따로 불러 "이의 없다"는 각서를 쓰라고 요구한 것이다.
사실상 교육청과 장학사라는 공공기관과 그 종사자에게 2차 가해를 당한 상황. 서씨는 그럼에도 "내가 나섬으로써 다음 피해자는 덜 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정신과 의사의 성착취를 세상에 처음 알린 이후
서씨는 몇 년 전 치료를 위해 찾은 병원에서 정신과 의사로부터 '그루밍(길들이기) 성범죄'라는 성적 착취를 당했다. 검찰에 알렸으나 돌아온 것은 불기소 처분. 성관계를 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위력 행사 증거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서씨를 시작으로 또 다른 피해자들이 잇따라 나타나면서 가해자는 결국 처벌을 받았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2018년 그를 제명했고, 가해자에게는 다음해 강제추행 및 협박 등의 혐의로 징역1년6월(집행유예3년)이 내려졌다. 이제 고통은 끝나리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권선징악의 동화와는 달랐다.
가해자인 의사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그를 고발하는 글을 올린 서씨를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 및 모욕죄로 고소했다. 검사는 '허위'를 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와 모욕죄로 약식기소(벌금 100만원)하는 공소장을 썼다. 약식기소가 결정되자 교육청에서는 징계위원회를 열어 견책을 의결했다. 서씨가 정식재판을 청구해 재판을 앞두고 있었지만 법원 선고 결과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성범죄 피해자에게 징계를 내린 사실이 알려지자 교육청에는 항의 민원이 40여 건 이상 쏟아졌다. 곽 장학사는 학교로 찾아와 민원 뭉치를 들이밀며 ‘선생님이 민원을 촉발시킨 책임이 있다’라고 타박을 줬다.
모든 민원을 읽고 징계 절차에 이의가 없다는 각서를 쓰라는 것이 곽 장학사의 요구였다. 서씨의 거부에도 그는 "각서를 못 쓰겠다면 이의가 없단 말이라도 하라"고 재차 압박했다. '원하는 대로 하시라'고 답한 후에야 서씨는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실제로 이후 항의 민원에는 '당사자는 징계에 이의가 없다고 했다'는 내용의 답변이 달렸다.
명예훼손 공소 기각됐지만··· '징계'는 유지
서씨의 청구로 시작된 정식재판에서 가해자는 갑자기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말을 바꿨다. 가해자가 고소를 취하하면서 재판은 공소 기각으로 마무리됐다. 징계의 원인이 사라졌으니 교육청의 견책도 자연스레 취소되리라 생각했다. 정작 도교육청은 '한번 내린 징계는 취소할 수 없다'고 했다. 무죄가 나오든 공소 사실이 없어지든 제도상 징계 철회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징계 불복 절차인 소청심사 기간도 지나 도움을 요청할 곳도,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견책을 받아 다른 학교로 강제 전보를 당한지 6개월 가량이 흐른 시점인 지난해 8월 곽 장학사가 서씨가 근무하는 학교의 교장으로 발령이 난 것.
서씨는 그 동안 두려움에 말하지 않았던 곽 장학사의 2차 가해 사실을 교육청에 알렸다. 그는 "내가 말을 안 하면 앞으로 삶이 계속 힘들어질 것 같았다"라고 했다. 지인도 서씨의 징계가 부당하다며 사면을 호소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나섰다. 청원은 2만 명이라는 적지 않은 이들이 뜻을 함께했다. 그러나 청와대로부터 답변을 받을 수 있는 20만 명에는 못 미치는 숫자다.
교육청은 곽 장학사의 발령은 취소했으나, 서씨에게 내린 징계 철회는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경북도교육청 관계자는 "다방면으로 변호사 자문을 받는 등 (징계 취소) 방법을 알아봤지만 근거가 마땅치 않다"라고 했다. 관련 법이나 징계업무 편람에 이런 상황에서 징계를 취소하거나 재심을 청구할 제도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서씨에게 내린 견책도 "공무원 비위사건 처리기준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씨는 이에 "징계위원회가 있다는 건 어떤 사안인지 살펴보겠다는 의미인데, 성폭력 피해자인 사실을 알면서도 징계를 하는 게 피해자를 보호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피해자에게 '숨으라' '참으라'는 조직과 구성원들
성범죄 피해를 고발하자 서씨의 주변인들은 '학교를 옮기라'거나 '다른 시·도로 가라'는 조언을 건넸다. 주로 같이 교직에 몸담고 있는 이들이었다.
곽 장학사의 2차 가해 사실을 알리고 시끄러워지자 교육청에서도 다른 학교로 옮길 생각은 없느냐고 물어왔다. 그가 겪은 사건을 모르는 곳에서 새로 시작하라는 취지다. '견책은 가벼운 징계니 조용히 지나가면 좋지 않겠나' '계속 교사로 일할 텐데 교육청을 압박하는 건 썩 좋지 않을 것'이란 말도 들었다.
'걱정해주는 마음'이라지만, 우리 사회가 성범죄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해 서씨는 입안이 쓰게 느껴졌다. 그는 "가해자도 아닌데 물의를 일으킨 것마냥 취급한다"라며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왜 죄지은 것처럼 피해 다녀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이 (범죄 사실을) 밝히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를 내서 고발했다면 보상은 없더라도 사회적으로 불이익은 없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서씨는 침묵하지 않은 가치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말했다. "견책이라는 징계가 취소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숨기고 감추지 않고 이렇게 떠들다 보면 법이 바뀌거나 해서 앞으로 다른 사건을 처리할 때는 제 사건처럼 안 다루고 더 신중하게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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