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단독] 여성독립운동가 김란사 친필 추정 우리나라 최초 파이프오르간 기념엽서 첫 공개

글 이현준 기자 2021. 2. 3.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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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2년간의 모금운동 끝에 우리나라 최초의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한 독립운동가 김란사. 그에게 파이프오르간은 그저 악기가 아니라 구국의 상징이자 독립을 향한 소망이었다. 한국 여성 최초의 미국 문학사이자 신여성, 독립운동가 김란사의 삶을 소개한다.

"이 엽서는 최근에 발견됐습니다. 언론엔 처음으로 공개하는 겁니다." 

1월 8일 서울 중구 정동길에 위치한 이화박물관, 독립운동가 김란사(1872~1919) 남동생의 손자(종손자)인 김용택(74) 김란사애국지사기념사업회 회장은 기자에게 자료를 보여주며 감개무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뜻 봐도 오래전 것으로 짐작되는 엽서. 앞면엔 단체 사진과 함께 '정동교회(현 정동제일교회)에 설치된 파이프오르간 앞에서 이화학당 학생들이 기념 촬영했다’며 '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의 기부로 한국에 설치된 최초의 파이프오르간’이라 밝힌 문구가 적혀 있다. 뒷면엔 영어 필기체로 쓰인 글이 있었다. 김 회장과 함께 자리한 서은진 이화박물관 학예사가 설명을 덧붙였다. "모금 활동에 동참해준 미국의 동포들에게 서울에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됐다는 소식과 함께 고마움을 전하는 글입니다. 필체를 보았을 때 김란사의 친필로 추정돼요. 앞면 사진은 정동제일교회가 이미 보유하고 있는 것이지만 여기에 김란사 친필과 설명 문구가 더해진 엽서는 새롭게 발견된 겁니다." 

1 세계감리교 총회 평신도 대표 파견 당시 기념사진. 2 김란사의 남편 하상기. 3 미국 유학시절 김란사.
이번에 공개된 엽서는 우리나라 최초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한 김란사의 족적을 더욱 선명하게 한다. 김란사는 1916년 미국으로 건너가 2년여간 전역을 돌며 동포들에게 고국에 파이프오르간을 보내기 위한 모금을 호소했다. 1916년 김란사가 안창호(1878~1938)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오르간을 구매해 서울 정동교회에 설치해드리는 건 매우 적절한 일이라고 확신합니다. 모국 동포들에겐 그들과 모국 땅을 사랑하고 기억하는 우리들의 기꺼운 기념품이 될 것이며, 조국 동포들께서 저희를 사랑해주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1918년 마침내 정동제일교회에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된다. 당시 기준으로 오르간의 가격은 약 2천5백원. 운반 및 설치 비용까지 포함하면 5천원 이상의 자금이 들었다. 서 학예사는 "정동제일교회 건축비가 8천원이었고 1920년대 1인당 월 생활비가 40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액수"라고 설명했다. 또 "파이프오르간 설치는 오직 한국민의 힘만으로 달성된 업적이다. 시간과 노력이 더 들지언정 외국의 힘을 빌리지 않겠다는 김란사의 의지 때문이었다"고 덧붙였다. 

김란사는 왜 파이프오르간에 이토록 공을 들였을까. 또 어째서 한국민의 힘만으로 이를 해내야 한다고 여긴 걸까. 그에게 파이프오르간은 단순히 예배를 위한 악기가 아니었다. 서 학예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기도 했던 김란사에게 파이프오르간은 조국 독립 염원을 담은 상징물과도 같았다. 태평양 동서로 갈려 있는 동포들의 힘을 모아 얻은 파이프오르간으로 예배 드리면 하나님께서 독립을 주시리라 믿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파이프오르간이 실제로 독립운동에 쓰이기도 했다. 오르간의 송풍구는 사람이 한두 명 정도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컸는데, 3.1운동 당시 이곳에서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는 만세운동 소식을 담은 '독립신문’이 인쇄되는 등 독립운동의 아지트로 사용됐다"고 덧붙였다.

평생 조국 계몽과 독립운동에 매진한 김란사의 일생

김란사의 종손자 김용택 ‘김란사애국지사기념사업회’ 회장. 김란사가 조명되는 데엔 김 회장의 노고가 있었다.
파이프오르간 설치는 김란사의 업적 중 일부다. 그는 조국 계몽에 투신한 독립운동가이자 선각자의 일생을 살았다. 김란사는 1872년 평양에서 태어나 1874년 서울로 이주한다. 부모는 객주를 운영했고 가정환경은 유복한 편이었다. 1893년 17세 연상의 정부 관리 하상기와 결혼하는데, 하상기는 전처인 조 씨와 사별한 후 재혼이었다. 하상기의 집안도 풍족해 경제적으론 부족할 게 없는 환경이었지만 김란사는 안락한 생활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1894년 당시 유일한 여성 근대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이화학당엔 금혼 학칙이 있었다. 기혼자에 딸(하원옥)까지 있었던 김란사가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선교사이자 이화학당 제4대 교장인 룰루 프라이는 김란사의 입학 요청을 거절했다. 하지만 그대로 꺾일 김란사가 아니었다. 그는 하인이 들고 있던 등불을 입으로 불어 끄며 "우리가 캄캄하기를 이 등불 꺼진 것과 같습니다. 어머니들이 무언가 배우고 알아야 자식을 가르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며 간곡히 부탁한다. 이에 감명받은 프라이 교장은 입학을 허가한다. 

김란사는 이화학당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웠고 세례를 받아 개신교 신자가 된다. 세례명은 낸시(Nancy)였는데, 지금까지 전해지는 '란사’라는 이름은 이를 따 개명한 것이다. 이후에도 김란사의 배움에 대한 열망은 꺼지지 않았다. 1895년엔 남편과 일본 게이오기주쿠(경응의숙)로 유학을 떠났고 1897년엔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 역시 남편과 함께였는데, 남편의 성을 따르는 미국 관습에 따라 입국신고서엔 '란사 하’로 이름을 기재했다. 오랜 기간 하란사로 불린 이유는 이 때문이다. 

미국 입국 후 김란사는 워싱턴 D.C.의 하워드대를 거쳐 1900년엔 오하이오 주의 웨슬리언대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당시 웨슬리언대에는 고종의 5남 의친왕 이강도 유학 중이었는데, 이를 계기로 김란사는 황실과도 연을 맺게 된다. 1906년엔 웨슬리언대 문학사 학위를 취득한다. 이는 우리나라 여성으로선 최초였다. 

같은 해 유학을 마치고 조선으로 귀국한 김란사는 본격적으로 교육자의 길을 걸으며 조국 발전에 이바지한다. 모교인 이화학당, 주간학교(Day School), 서울 상동교회 등에서 여성들에게 영어와 성경을 가르쳤다. 고종의 계비(엄비)가 진명·숙명학교를 설립할 때 자문에 응하는가 하면 부인성서학원을 창설하고 이화학당 육아교실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로 1909년엔 고종으로부터 은장을 수훈했다. 또 뛰어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고종의 통역사로도 활동했다. 

1910년엔 이화학당의 총교사(교감)와 기숙사 사감을 맡는다. 이화학당 안에 대학과가 생기자 김란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학교수로 부임한다. 이화학당 학생 동아리 이문회(以文會)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김란사는 이문회 지도 교사로서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힘썼다. 그는 학생들에게 "꺼진 등에 불을 켜라"라고 민족의 사명을 강조하곤 했다. 이문회는 이화학당 학생들의 지식과 덕을 연마시키는 산실이 됐는데, 바로 3·1운동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유관순이 이문회 회원이었다. 김란사가 유관순의 스승으로 이름을 떨친 까닭이기도 하다. 

1916년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세계감리교 총회에 우리나라 평신도 대표로 참석했고 시카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파이프오르간 구입을 위한 모금 활동을 벌인 것도 이때다. 1918년 귀국해 정동제일교회 벧엘 예배당에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한다. 

1919년 김란사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고종의 밀지를 받아 비밀리에 의친왕의 파리강화회의 파견을 추진하지만 1919년 1월 고종의 갑작스러운 붕어(崩御)로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 이에 혼자서라도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3월 출국하지만 파리에 가기 전 거친 베이징에서 동포들이 마련한 만찬에 참석했다가 다음 날 입원, 3일 만에 급사한다. 사망 원인에 대해선 당시 일본 외무성 기밀문서 '제120호’에 김란사의 죽음을 '극약을 먹고 자살한 것’이라 추측한 점, 시신이 검게 변해 있었다는 남편의 증언 등으로 독살된 것이라는 설이 있지만 아직 명확히 밝혀지진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김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이자 트렌드세터

이화박물관에서 김란사에 대해 설명하는 김용택 회장.
너무나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김란사. 이제까지 밝혀진 기록 속 흔적을 통해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김란사는 위생 및 보건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1908년 간호원양성학교 초대 교장 에드먼즈가 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 교과서 검수를 맡았을 정도다. 또 김란사가 총교사였을 때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김폴린이 쓴 '주님이 함께한 90년’(1989년, 보이스사)에서 그의 철저한 위생관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선진국 유학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위생은 곧 건강과 직결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김폴린은 김란사에 대해 "그는 학생들의 건강 유지에 힘을 써 매주 전체 기숙사생이 목욕하고 머리를 감고 화장실에 다녀 온 후나 귀가 후, 식사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게 했다" "손수건 쓰는 법을 장려해 흰 손수건을 왼쪽 소매에 항상 넣고 다니게 했다. 특히 기침이나 재채기 날 때 즉시 수건을 꺼내 입을 가리도록 했다"고 회고했다. 

김란사는 '할 말은 하는’ 신여성이었다. 그의 소신은 윤치호(1865~1945)와 벌였던 논쟁에서 선명히 드러난다. 윤치호는 1911년 7월 영문 선교 잡지 '더 코리아 미션 필드’에 학당에 다니는 신여성들을 "요리, 빨래, 다림질을 할 줄 모른다" "시어머니에게 순종적이지 않다" "육체노동을 꺼려 한다"며 비판하는 기고문을 올린다. 그리고 "보통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들"이라며 설거지, 요리. 다림질, 자수, 뜨개질, 먼지 털기 등 12가지 교육과정을 제안한다. 김란사는 같은 해 12월호에 기고문을 게재해 윤치호의 주장을 강력히 반박한다. 

그는 "그(윤치호)가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거나 맹목적인 편견을 갖고 있다 확신한다"며 "학교의 목적과 방향은 요리사나 간호원, 침모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 깨우친 신여성을 배출하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신여성 김란사’는 스타일 면에서도 앞선 감각을 갖고 있었다. 1906년 미국에서 귀국하며 우리나라 최초로 선보인 퐁파두르 헤어스타일(앞머리를 이마에서부터 뒤로 빗어 넘겨 이마를 내놓는 머리 모양)이 대표적 예다. 이는 곧 유행이 돼 이화학당 학생들도 따라 하게 된다. 당시의 '트렌드세터’였던 셈이다. 

배우자 하상기와의 관계도 돈독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용택 회장은 "고모할머니(김란사)는 외출 시 항상 남편의 얼굴이 새겨진 배지를 착용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은진 학예사는 "그만큼 남편을 존경했다는 방증이다. 당시 여성 교육에 대한 인식이 열악했던 점을 감안할 때 김란사는 배움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남편에 대한 고마움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하상기 역시 '깨어 있는 남성’이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란사 재조명으로 여성 독립운동가 더 알려지길"

정동제일교회 전경과 파이프오르간. 파이프오르간은 6·25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됐다가 2003년 복원됐다.
이토록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김란사지만 하나뿐인 딸 하원옥이 폐병으로 일찍 사망, 대가 끊기며 한동안 잊히고 만다. 김란사의 사망 원인을 파악할 수 없었음은 물론 유해조차 찾지 못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유관순의 스승으로 알려지며 조명받기 전엔 대중에게 이름조차 생소할 만큼 알려지지 않은 게 현실이었다. 소위 '카더라’ 식으로 이야기되며 잘못된 정보가 전해지기도 했다. 하상기의 후처(첩)로 들어갔다거나 기생이었다는 설이 대표적이다. 또 최근 김폴린의 '주님이 함께한 90년’이 조명되기 전까진 딸 하원옥의 나이는 물론 이름까지 자옥으로 잘못 알려지는 등 가족 관계도 온전히 파악되지 못했다. 

이와 같은 잘못을 바로잡아 김란사가 올바르게 조명되게끔 하는 데엔 김용택 회장의 노고가 컸다. 김 회장은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조각조각 흩어진 자료와 기록들을 구했다. 김란사의 이름을 찾아준 이도 그다. 김란사는 오랜 기간 '하란사’로 알려졌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당시에도 하란사라고 적혀 있었다. 국가조차 김란사의 성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김 회장의 노력 끝에 2018년 훈장에 적힌 이름을 김란사로 정정할 수 있었다.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었지만 그는 일생을 조국에 몸 바친 김란사가 정확히 알려지길 바라며 전심을 기울였다. 

김 회장은 그 이유에 대해 "고모할머니에 대해 잘못 알려진 사실이 너무나 많았다. 직계 후손이 이를 바로잡았으면 좋았겠으나 대가 끊기고 말았다. 저는 그분이 기생 혹은 첩으로 알려지는 것, 특히 그분이 '전주 김씨’인데 '김해 김씨’로 알려지고 있는 걸 묵과할 수 없었다. 우리 집안 전체가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고 밝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나마 고모할머니는 어느 정도 알려져 다행이지만 여전히 잊힌 채 지하에서 울고 계신 여성 독립운동가가 수없이 많습니다. 그분들도 역사의 조명을 받아 제대로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김 회장의 말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1월 20일 기준 독립유공자(1만6천4백10명) 중 여성은 약 3%(4백93명)에 불과하다. 생몰년도는 물론 신상조차 제대로 파악이 되지 못하고 있을 만큼 여성 독립운동가 조명 상황은 열악하다. 서은진 학예사는 "그마저도 알려진 사람만 지속적으로 조명하는 '쏠림’ 현상이 발생하는 상황"이라 했다. 김란사에 대한 재조명이 더욱 의미를 갖는 까닭이다. 서 학예사는 "김란사는 우리나라 여성 지식인이자 선각자로서 독립운동과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분이다. 그럼에도 김란사는 유관순을 연구하다 '유관순의 스승’으로 부각돼 재조명 된 게 사실이다. 그러나 김란사는 '누군가의 스승’으로서가 아니더라도 그 자체로 독립운동사에서 충분히 중요한 분"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다음과 같은 바람을 덧붙였다. "여성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은 물론 관련 자료도 부족하고 조사도 미진합니다. 때문에 특정인만 부각돼왔던 게 현실이에요. 한평생 독립운동에 몸 바쳤지만 흥밋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관심 속에 묻히고 마는 여성 독립운동가가 많아 안타까워요. 최근 김란사에 대한 재조명으로 말미암아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지속적으로 조명되면 좋겠습니다."

사진 조영철 기자 
사진제공 김란사애국지사기념사업회 이강옥 김세환 한국학중앙연구원

글 이현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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