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귀국 암 투병 사할린동포 할아버지 "가족과 같이 살고파"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암 치료가 끝나면 큰딸과 작은딸, 손자들이 사는 사할린에서 살고 싶어요."
사할린 동포 허남훈(85)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망이다. 강제 징용된 아버지와 6살 때 사할린에 끌려갔던 그는 광복 이후 고국에 돌아오는 것이 꿈이었다. 오매불망 기다리다 67년 만인 2009년 그 꿈을 이뤄 고국에 영주 귀국했다.
12년 동안 김포시 서암마을에서 거주한 그는 평생 삶의 터전이자 가족이 있는 사할린에 다시 돌아가려고 한다.
지난해 26일 딸들과 손자들을 보기 위해 사할린을 찾은 허 할아버지는 3일 연합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나이가 들어 혼자 사는 게 힘들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뿐만 아니라 다른 병에 걸려 아프면 혼자서는 이겨낼 수 없을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그의 영주귀국 삶은 기쁨도 잠시, 고통과 외로움을 견뎌내는 일이었다. 정부가 동반자 외에는 가족을 배제한 채 영주귀국을 추진했기에 처음부터 '이산가족'으로 살아야 했다.
할아버지는 사할린의 가족과 그리움을 잊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
"영주귀국자들로 구성된 '서암 봉사회 회장'을 맡아 고구마를 심고, 가꾸고, 수확하는 일을 했어요. 복지회관 식당에서 점심을 나눠주는 일도 했고요. 마을 하천 쓰레기 줍기에도 나섰습니다."
하지만 영주귀국 4년 만에 부인이 암 투병 끝에 먼저 하늘나라로 떠났고, 자신도 위암과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는 악재가 겹쳤다.
항암치료를 받으며 홀로 사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그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사할린에 두고 온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확진 판정은 9월께 나온다고 한다.
사할린 사범전문학교 조선어과를 졸업한 그는 수학과 한국어 교사로 일하면서 틈틈이 소설을 써 '향수를 달래며' 등을 남겼다. KBS 라디오 한민족방송 체험수기 '나는 대한민국 국민입니다'로 수상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러시아어는 유창하지만, 한국어는 아직도 어눌한 그는 글을 쓰면서 그리움을 달래고, 외로움을 버텨냈다고 한다. 암 투병 때 쓴 '송어 떼', '오리에게 부탁하네' 등의 시를 계간지 '문예세상'에 보냈고, 이 작품들이 당선돼 최근 정식 시인으로 등단했다.
5년 동안 치료를 받으며 깊게 드리웠던 죽음의 그림자가 걷히는 듯 보이자 할아버지는 "수년 만에 고향 찾은 어미 되어 돌아온/ 그 넓고 넓은 대양도 버리고 돌아온/ 그래도 고향이 좋아 날뛰는"이라고 읊은 그의 시 '송어 떼'처럼 원래 뛰놀던 고향 집을 찾아가고 싶어 한다.
"주로 복지회관에서 나눠 주는 음식으로 점심을 해결하고요. 아침과 저녁에는 혼자서 빵을 먹어요. 암 치료가 끝나면 사할린에서 살아야죠. 딸과 손자들과 둘러앉아 밥을 먹고 싶어요."
사할린에는 허 할아버지처럼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까지 강제 징용된 한인 15만여 명이 살았다. 탄광 등에서 혹사당하며 1945년 8·15 광복 당시 이 섬에 살아남은 한인은 4만3천여 명이었다. 이들은 일본이 국적이거나 일본인 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고, 이후 소련에서는 한국과의 미수교로 무국적자 신세로 전락해 어렵게 살았다.
한국은 1993년 '사할린 동포 문제는 일본의 책임'이라는 인식을 토대로 일본 정부의 지원 필요성을 주장했고, 일본이 받아들이면서 이듬해부터 영주귀국 사업을 펼쳤다. 하지만 한인 1세와 그 배우자, 장애인 자녀만이 대상에 포함되면서 직계비속과의 '제2의 이산'이라는 아픔이 또 발생했다.
정부는 이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사할린 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었고, 올해 1월 1일 시행에 들어갔다. 직계비속 1인과 그 배우자까지 확대한 것이다.
허 할아버지의 딸들도 이 법의 적용 대상이긴 하지만, 딸들은 "고국에서 딱히 할 일이 없다"며 영주귀국을 꺼리고 있다. 결국 할아버지가 딸들이 있는 사할린에서 생애를 마감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ghw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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