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부 '北 원전 문건' 공개했지만.. 여전히 남는 의문들 [이슈+]
문건 내용 자체 상당히 디테일
많은 기간 준비한 것으로 보여
'검토 의견'은 전문가 의뢰 의혹
탈원전 정책 추진되던 때 작성
기조 반하는 방안 검토 어려워
산업부 "재판 진행 중.. 답변 못해"
국민의힘, 진상조사특위 꾸리기로
4월 보선 앞두고 이슈 선점나서
與 '선거철 낡은 북풍공작' 반발
공사 중단된 北 경수로 2호기 현장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주도로 이뤄지다 2002년 이후 공사가 중단된 당시 북한 함경남도 금호지구(신포) 경수로 2호기 현장 모습. 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 1일 공개한 ‘북한지역 원전건설 추진방안’ 보고서는 북한에 원전을 건설할 경우 이 지역에 세우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밝혔다. KEDO 홈페이지 캡처 |
산업부는 지난 1일 오후 ‘북한지역 원전건설 추진방안’이라는 제목의 6쪽 분량의 보고서를 전격 공개했다.
본문에는 세 가지 북한 원전건설 추진 시나리오와 시나리오별 장·단점 등의 내용이 담겼다. 보고서는 “내부 검토 자료이며 정부의 공식입장이 아님”을 적시했다. 또 북·미 간 비핵화 조치 등 불확실성이 있어 당시 상황에서 “구체적 추진방안 도출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도 명시했다. 작성자의 이름이나 작성 시기, 윗선 보고 여부도 나와 있지 않다.
이에 대해 산업부는 “남북경협 활성화를 대비한 아이디어 차원에서 검토한 자료이며 추가적 검토나 외부 공개 없이 그대로 종결됐다”며 “정부 정책으로 추진된 바 없다”고 못박았다.
문서작성 시기가 문재인정부의 탈원전 정책이 한창 추진되던 시기라는 점 역시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문재인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탈원전을 주요 공약으로 앞세워 추진했다. 2017년에는 고리 1호기 영구정지를, 2018년엔 월성원전 조기 폐쇄 결정을 앞둔 상황이었다. 그러나 보고서는 원전 부지와 노형, 사용후핵연료 처분 방안까지 구체적으로 제시됐고, 신한울 3·4호기 완성까지 거론됐다.
또 다른 전직 고위공무원은 “정부 기조에 반하는 정책을 윗선의 지시 없이 실무진이 먼저 나서서 검토했다는 점이 일반적이지는 않다”고 지적했다. 산업부는 이 보고서가 어느 선의 지시로 시작됐으며, 검토와 보고가 이뤄졌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여러 요소들로 감사 방해 혐의인지 공용기록물 손상 혐의인지 등을 특정할 수 있고, 현재 진행 중인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부분은 밝히기 어려운 점을 양해해 달라”고 말했다.
산업부가 업데이트하지 않은 ‘구(舊)버전’ 보고서를 공개한 점도 의혹을 낳고 있다. 산업부가 공개한 파일 이름은 ‘180514_북한지역원전건설추진방안_V(‘버전’으로 추정)1.1’이지만 다음날 작성된 ‘180515_북한지역원전건설추진방안_V1.2’도 삭제 파일에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산업부가 공개한 세 가지 안의 실현 가능성은 상당히 떨어지기 때문에 고위급에서 검토됐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관측도 나온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은 “(3가지 안 모두) 한·미 원자력협정에 근본적으로 어긋난다. 현 단계에서 실현이 어려운 안”이라고 설명했다.
정부의 ‘북한 원전 건설 추진’ 문건에 대한 야당의 공세가 연일 거세지고 있다. 국민의힘이 국회 차원의 국정조사 추진 등 총력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이번 사태가 오는 4월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2일 정치권에 따르면 국민의힘은 문재인정부가 2018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북한에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추진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국민적 동의 없이 북한에 원전을 지어주려는 계획이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같은 의혹이 사실일 경우 정부의 핵심 정책 기조인 탈원전과 배치된다.
여당은 국민의힘의 공세가 선거철 ‘북풍공작’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는 이날 임시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이번 사태와 관련해 “낡은 북풍공작으로 국민을 현혹하려 하는 국민 모독을 끝내자”고 말했다. 국민의힘이 보궐선거를 앞두고 북한 관련 이슈를 끌어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주장이다.
산업통상자원부가 공개한 ‘북한 원전건설 추진방안’ 문건을 둘러싼 청와대와 여당, 야당 간 설전이 가라앉을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다. 청와대와 정부·여당은 야당인 국민의힘이 선거에 매몰되어 무리한 주장을 하고 있다며 강력 대응을 천명했다. 반면 국민의힘은 상부 지시 없이 만들기 어려운 문서라는 주장을 펴면서 국정조사가 필요하다고 맞받아쳤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 후보자는 2일 “북한과 대화 과정에서 원전 문제를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2018년 4월 판문점회담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건넨 ‘한반도 신경제구상 USB’에는 원전 관련 내용은 없었다고 말했다. 현 정부 첫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으로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정 후보자는 북한 원전 추진 의혹이 수그러지지 않자 조기 진화를 위해 기자와의 만남을 자청했다.
정 후보자는 이날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 인근에서 기자들과 만나 “정부 차원에서 대북 원전 제공 문제를 내부적으로 검토도 안 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문제의 USB에 담긴 내용과 관련해서도 “신재생에너지 협력, 낙후된 북한 수력·화력발전소의 재보수 사업 등 아주 대략적 내용이 포함됐다”며 “원전은 전혀 포함이 안 돼 있었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러면서 △비핵화협상 마무리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해제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복귀 △북한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세이프가드 협정 체결 △북한과 원전 제공 국가 간 원자력 협력 협정 체결 등의 조건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이런 정보를 미국과 충분히 공유했다”며 판문점회담 후 워싱턴을 방문해서 미국에 동일한 내용의 USB를 제공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것은 한반도 비핵화가 상당히 진전이 있을 경우 남북 간 경제협력의 비전을 제시하는 목적의 자료였다는 점을 설명했다”며 “미국이 충분히 수긍했고, 사실 미국이 굉장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주장했다.
앞서 최재성 청와대 정무수석은 이날 한 라디오 인터뷰에 출연해 문제의 USB 내용을 공개하라는 야당 주장에 대해 “절대 공개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근거 없는 의혹 제기에 정상들 사이에서 오간 내용을 공개하면 이후 정부정책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다만 “야당이 명운을 걸면 그에 상응해 청와대에서 책임을 걸고 할 수 있는 일은 하겠다”고 말했다. 반면 국민의힘 배준영 대변인은 “앞으로 상생의 정치는 더 이상 입에 담지 말길 바란다”며 “어떤 실무 공무원이 상부 지시 없이, 그리고 검토한 사항에 대한 보고 없이 이런 국가사업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마무리할 수 있는가”라며 의혹을 계속 제기했다.
이정우·홍주형·곽은산·이도형·장혜진 기자 woo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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