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부 '北 원전 문건' 공개했지만.. 여전히 남는 의문들 [이슈+]

이정우 2021. 2. 3.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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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부 '공개 문건' 남는 의문들
문건 내용 자체 상당히 디테일
많은 기간 준비한 것으로 보여
'검토 의견'은 전문가 의뢰 의혹
탈원전 정책 추진되던 때 작성
기조 반하는 방안 검토 어려워
산업부 "재판 진행 중.. 답변 못해"
국민의힘, 진상조사특위 꾸리기로
4월 보선 앞두고 이슈 선점나서
與 '선거철 낡은 북풍공작' 반발
공사 중단된 北 경수로 2호기 현장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주도로 이뤄지다 2002년 이후 공사가 중단된 당시 북한 함경남도 금호지구(신포) 경수로 2호기 현장 모습. 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 1일 공개한 ‘북한지역 원전건설 추진방안’ 보고서는 북한에 원전을 건설할 경우 이 지역에 세우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밝혔다. KEDO 홈페이지 캡처
정부가 북한에 원전을 지어주려 했다는 논란이 커지자 산업통상자원부가 해당 문서를 공개했지만 의혹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산업부는 지난 1일 오후 ‘북한지역 원전건설 추진방안’이라는 제목의 6쪽 분량의 보고서를 전격 공개했다.

본문에는 세 가지 북한 원전건설 추진 시나리오와 시나리오별 장·단점 등의 내용이 담겼다. 보고서는 “내부 검토 자료이며 정부의 공식입장이 아님”을 적시했다. 또 북·미 간 비핵화 조치 등 불확실성이 있어 당시 상황에서 “구체적 추진방안 도출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도 명시했다. 작성자의 이름이나 작성 시기, 윗선 보고 여부도 나와 있지 않다.

이에 대해 산업부는 “남북경협 활성화를 대비한 아이디어 차원에서 검토한 자료이며 추가적 검토나 외부 공개 없이 그대로 종결됐다”며 “정부 정책으로 추진된 바 없다”고 못박았다.

하지만 수천억∼수조원대 대북 지원사업을 실무진이 윗선의 지시 없이 단순히 아이디어 차원에서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지적이다.
산업부가 공개한 6쪽짜리 문건. 연합뉴스
2일 한 전직 고위공무원은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이 같은 중대한 사안의 문건을 실무선에서 아이디어 차원으로 만들었다가 자체 종결했다고 하는 점에는 분명 의구심이 든다”며 “보고서 내용 자체를 볼 때도 상당히 디테일하고 상당기간 준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또 보고서 말미엔 ‘검토의견’을 제시한 부분도 있는데 이를 토대로 외부 전문가 검토까지 이뤄진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문서작성 시기가 문재인정부의 탈원전 정책이 한창 추진되던 시기라는 점 역시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문재인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탈원전을 주요 공약으로 앞세워 추진했다. 2017년에는 고리 1호기 영구정지를, 2018년엔 월성원전 조기 폐쇄 결정을 앞둔 상황이었다. 그러나 보고서는 원전 부지와 노형, 사용후핵연료 처분 방안까지 구체적으로 제시됐고, 신한울 3·4호기 완성까지 거론됐다.

또 다른 전직 고위공무원은 “정부 기조에 반하는 정책을 윗선의 지시 없이 실무진이 먼저 나서서 검토했다는 점이 일반적이지는 않다”고 지적했다. 산업부는 이 보고서가 어느 선의 지시로 시작됐으며, 검토와 보고가 이뤄졌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여러 요소들로 감사 방해 혐의인지 공용기록물 손상 혐의인지 등을 특정할 수 있고, 현재 진행 중인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부분은 밝히기 어려운 점을 양해해 달라”고 말했다.

산업부가 업데이트하지 않은 ‘구(舊)버전’ 보고서를 공개한 점도 의혹을 낳고 있다. 산업부가 공개한 파일 이름은 ‘180514_북한지역원전건설추진방안_V(‘버전’으로 추정)1.1’이지만 다음날 작성된 ‘180515_북한지역원전건설추진방안_V1.2’도 삭제 파일에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산업부가 공개한 세 가지 안의 실현 가능성은 상당히 떨어지기 때문에 고위급에서 검토됐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관측도 나온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은 “(3가지 안 모두) 한·미 원자력협정에 근본적으로 어긋난다. 현 단계에서 실현이 어려운 안”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북한지역 원전건설 추진방안 보고서가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에서 보고된 정황이 있다는 보도에 대해 통일부 당국자는 “산업부가 제출한 자료에는 원전 관련 사항이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北원전’ 총공세… 보수층 결집 나선 野

정부의 ‘북한 원전 건설 추진’ 문건에 대한 야당의 공세가 연일 거세지고 있다. 국민의힘이 국회 차원의 국정조사 추진 등 총력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이번 사태가 오는 4월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2일 정치권에 따르면 국민의힘은 문재인정부가 2018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북한에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추진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국민적 동의 없이 북한에 원전을 지어주려는 계획이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같은 의혹이 사실일 경우 정부의 핵심 정책 기조인 탈원전과 배치된다.

야당의 이번 공세는 선거를 두 달 앞두고 보수 지지층을 결집시키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상대적으로 관심도가 떨어지는 보궐선거에선 핵심 지지층 투표율이 중요한 만큼, 여권이 가덕도 신공항 건설과 이익공유제 등 주요 이슈를 선점한 가운데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여권의 대북전단금지법 입법과 북한 백신 지원 주장 등으로 문제가 불거졌던 가운데, 야당에서 (이번 대북 이슈가) 선거에 필요한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는 판단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의힘 조경태 의원이 2일 국회 본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가 교섭단체 대표연설 중 북한 원전 건설 추진 논란과 관련해 "제1야당 지도자들이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었다. 묵과할 수 없는 공격을 대통령에게 가했다"며 비판하자 스마트폰에 "떳떳하면" 글을 써 보이며 항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의힘은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당 차원의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꾸리기로 하면서 여권을 향한 공세를 이어가겠다는 방침이다.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는 이날 기자들에게 “청와대와 민주당 말을 국민들은 믿지 않기 때문에 국민이 충분히 납득할 만한 객관적인 증거로 의혹을 해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당은 국민의힘의 공세가 선거철 ‘북풍공작’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는 이날 임시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이번 사태와 관련해 “낡은 북풍공작으로 국민을 현혹하려 하는 국민 모독을 끝내자”고 말했다. 국민의힘이 보궐선거를 앞두고 북한 관련 이슈를 끌어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여권이 강경한 대응에 나서면서 이번 의혹 제기가 야당에게 오히려 악재가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신빙성 있는 증거가 나오지 않을 경우 여론이 돌아설 수 있다는 것이다. 박상철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는 “실체를 잡기 힘든 상황에 (이번 의혹에 대한 정치권) 공방이 끝난다면, 경우에 따라선 ‘합리적인 비판이 아니었다’며 (야당이) 역풍을 맞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서훈 국가안보실장(왼쪽)과 최재성 정무수석이 2일 청와대에서 열린 영상 국무회의에서 대화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정의용 “北과 원전 거론 안해… 美에 동일한 내용 USB 제공”

산업통상자원부가 공개한 ‘북한 원전건설 추진방안’ 문건을 둘러싼 청와대와 여당, 야당 간 설전이 가라앉을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다. 청와대와 정부·여당은 야당인 국민의힘이 선거에 매몰되어 무리한 주장을 하고 있다며 강력 대응을 천명했다. 반면 국민의힘은 상부 지시 없이 만들기 어려운 문서라는 주장을 펴면서 국정조사가 필요하다고 맞받아쳤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 후보자는 2일 “북한과 대화 과정에서 원전 문제를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2018년 4월 판문점회담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건넨 ‘한반도 신경제구상 USB’에는 원전 관련 내용은 없었다고 말했다. 현 정부 첫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으로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정 후보자는 북한 원전 추진 의혹이 수그러지지 않자 조기 진화를 위해 기자와의 만남을 자청했다.

정 후보자는 이날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 인근에서 기자들과 만나 “정부 차원에서 대북 원전 제공 문제를 내부적으로 검토도 안 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문제의 USB에 담긴 내용과 관련해서도 “신재생에너지 협력, 낙후된 북한 수력·화력발전소의 재보수 사업 등 아주 대략적 내용이 포함됐다”며 “원전은 전혀 포함이 안 돼 있었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러면서 △비핵화협상 마무리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해제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복귀 △북한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세이프가드 협정 체결 △북한과 원전 제공 국가 간 원자력 협력 협정 체결 등의 조건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이런 정보를 미국과 충분히 공유했다”며 판문점회담 후 워싱턴을 방문해서 미국에 동일한 내용의 USB를 제공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것은 한반도 비핵화가 상당히 진전이 있을 경우 남북 간 경제협력의 비전을 제시하는 목적의 자료였다는 점을 설명했다”며 “미국이 충분히 수긍했고, 사실 미국이 굉장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주장했다.

앞서 최재성 청와대 정무수석은 이날 한 라디오 인터뷰에 출연해 문제의 USB 내용을 공개하라는 야당 주장에 대해 “절대 공개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근거 없는 의혹 제기에 정상들 사이에서 오간 내용을 공개하면 이후 정부정책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다만 “야당이 명운을 걸면 그에 상응해 청와대에서 책임을 걸고 할 수 있는 일은 하겠다”고 말했다. 반면 국민의힘 배준영 대변인은 “앞으로 상생의 정치는 더 이상 입에 담지 말길 바란다”며 “어떤 실무 공무원이 상부 지시 없이, 그리고 검토한 사항에 대한 보고 없이 이런 국가사업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마무리할 수 있는가”라며 의혹을 계속 제기했다.

이정우·홍주형·곽은산·이도형·장혜진 기자 woo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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