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료 바꿨더니 온몸에 발진 "MSDS 교육만 받았어도.."
하청업체·비정규직 노동자에겐 더 요원
솜방망이 처벌에 감독 인력 부족도 문제
조기형(56)씨는 전남 대불산업단지의 조선소에서 근무하는 베테랑 용접공이다. 34년 동안 이 일을 하면서 배를 만들어내고 있다. 작업중 유해한 화학물질을 다룰 일은 없어 용접 일이 그저 안전할 줄로 알았지만, 최근 용접 과정에서 튀는 불꽃에서 가루·가스 형태의 유해물질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고선 충격에 빠졌다. 산업현장에서 노출될 수 있는 유해물질을 알려주는 '물질안전보건자료(MSDS·Material Safety Data Sheet) 교육'이 있지만, 그는 그런 교육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
필수교육지만...노동자들 "제대로 못 받아"
MSDS는 작업장에서 쓰이는 화학물질이나 혼합물의 이름과 함께 유해성이나 사고 시 대처법을 알려주는 일종의 '화학물질 안내서'다. 국내에서는 1996년부터 제도화돼 노동자 건강을 위협하는 유해물질은 반드시 MSDS를 마련해야 하고, 사업장은 노동자들이 잘 알 수 있도록 출력물 형태로 비치, 교육해야 한다. 특히 산업안전보건법은 새로운 유해물질이 도입되거나 신규 노동자가 투입될 때는 반드시 교육을 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산업현장 노동자들은 MSDS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MSDS를 비치하지 않거나 교육 의무를 준수하지 않은 업장 적발 건수가 2019년 기준 3,865건에 달한다는 고용노동부 조사도 이들 이야기를 뒷받침한다.
지난해 현대중공업 조선소에서는 다수의 도장 작업자들이 온몸에 피부발진 증상을 겪었다. 사용하는 도료가 유해 물질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그 자신과 주변 동료의 몸에 발진이 나고서야 유해성을 알아차렸다. 사업장은 사전유해위험성 평가를 포함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았고, MSDS 교육도 하지 않았다는 게 작업자들의 주장이다. 접촉성 피부염으로 직업병 유소견자(D1) 진단을 받은 현대중공업 노동자 A씨는 "교육을 통해 위험성을 알았다면 대비했을 텐데, 도료 성분을 직접 검색한 뒤 유해성을 알았다"며 "18년간 도장 일을 해왔는데, 다른 부서로의 배치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교육한 것처럼 서류를 꾸미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거제의 한 조선소에서 설비 설치업무 6년차인 B씨는 매년 특정 시기가 되면 관리자로부터 ‘MSDS 교육을 받았다’고 서명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그는 "관리자가 ‘고용노동부에서 검사가 나오면 교육을 받았다고 답하고, 만약 교육내용을 물으면 기억이 안 난다’라고 둘러대라고 했다"고 말했다.
노동·산업재해사건 전문 손익찬 변호사는 "유해물질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이 부족하고, 그 때문에 MSDS 교육이 매번 점검을 피하기 위한 형식적 차원에 그친다"고 지적했다.
MSDS교육... 비정규직에겐 '사치'
하청업체·비정규직 노동자로 눈을 돌리면 ‘MSDS 교육’은 사치에 가깝다. 포항 포스코 공장 비정규직 용접공 이모(58)씨는 15년 동안 단 한 번도 MSDS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이씨는 "하루 이틀씩 단기계약으로 일해서 매번 새로운 작업장에 투입됐지만, 재계약 때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선 교육받을 시간도 없이 일해야 했다"며 "산업재해 실사가 나온 뒤에서야 공장 관리자가 코크스 오븐 배출물질(COE·Cokes Oven Emmisions) 등 발암물질 이야기를 해줬다"고 토로했다.
사업 현장 근로자들의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불법업장 적발은 쉽지 않다. 고용노동부 소속 산업안전감독관 705명이 전국 수만개 업장을 대상으로 일일이 점검에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현장 점검이 어려워지면서 적발 건수는 예년의 15% 수준인 569건에 그쳤다. 적발됐더라도 처벌 수위가 낮아 재발방지 효과도 기대하기 어렵다. 과태료 300만원이 최고 수준이다. 이마저도 세 차례 이상 교육을 실시하지 않을 때 부과된다.
전문가들은 당국의 적발·처벌과 무관하게 사업자가 노동자의 알 권리 보장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문한다. 류현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장은 "업장 점검 근로감독관 수를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사업자 책임을 강화하고 자발적으로 근무환경을 개선하도록 명예산업안전감독관 제도 등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신범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부소장은 "사용 제품에 노동자들이 알아야 할 필수 내용이 적힌 라벨 부착 의무화도 고려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우태경 기자 taek0ng@hankookilbo.com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한국에서의 4년 9개월, 속헹씨가 죽어간 시간
- 홍남기, 이낙연표 '보편+선별' 지원 방안에 공개 반기
- "아침 습관이라"... 미얀마 여성 운동 영상에 포착된 쿠데타 현장
- 조두순, 결국 복지급여 120만원 수령...안산시 "배제할 사유 없어"
- [단독] '텅텅' 비었던 경기도 행복주택들의 이유있는 '완판' 행진
- "오세훈, 문서 작업 안 해봤나" 산업부 파일명 v.를 "VIP" 주장했다 조롱
- "원전공세, 안 참겠다" 으름장 놓고 '속도조절' 들어간 靑
- 하필 문 대통령 생일에 튼 'Song to the moon'… KBS "의혹 멈춰달라"
- '누가 어떤 백신 맞나' 매칭 딜레마… "정부가 설득할 수 있어야"
- 재활용 안 되는데 그냥 버려? 그래도 씻어서 분리배출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