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이루던 동주의 기숙사 방, 萬人의 공간으로
“나의 누추한 방이 달빛에 잠겨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는 것보담도 오히려 슬픈 선창이 되는 것이다. 창살이 이마로부터 콧마루, 입술 이렇게 하여 가슴에 여민 손등에까지 어른거려 나의 마음을 간지르는 것이다.”
1939년 1월 23일 자 조선일보 학예면에 실린 윤동주 산문 ‘달을 쏘다’의 한 구절이다. 연희전문(현 연세대) 1학년생 윤동주가 잠 못 이루던 방은 기숙사 핀슨관(館)에 있었다. 그가 떠난 뒤 신학관·음악관·법인사무처가 거쳐간 핀슨관이 최근 시인의 기념관으로 거듭났다.
윤동주 탄생 103주년인 지난해 12월 30일로 예정됐던 전면 개관은 코로나로 연기됐지만 이날을 기점으로 구글의 온라인 전시 플랫폼 ‘아트 앤드 컬처’와 유튜브 동영상으로 둘러볼 수 있게 됐다. 최근 이곳에서 만난 김성연 윤동주기념관 기획실장은 “윤동주가 기거했던 건물 중 지금까지 남아있는 곳은 핀슨관이 유일하다”면서 “기념관은 과거를 박제한 공간이 아니라 윤동주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만나고 생각을 나누는 공간”이라고 했다. 총 3층 가운데 1층은 전시관, 2층은 윤동주 연구의 중심이 될 도서관, 3층은 행사 등을 위한 다목적 공간이다.
1968년 최초의 윤동주 시비(詩碑)가 세워진 연세대 교정의 ‘윤동주 문학동산' 위쪽에 핀슨관이 있다. 기념관 건립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2013년 시인의 유족이 육필 원고를 포함한 유품 전체를 연세대에 기증하면서부터다. 2018년에 육필 원고가, 2019년에는 핀슨관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건립 기금은 연세대 동문인 시몬느 박은관 회장이 기부했다. 기념관은 유족과 동문, 윤동주기념사업회(회장 서승환 총장)와 운영위원회(위원장 김현철 문과대학장)를 비롯한 연세대측과 시인을 아끼는 이들의 오랜 염원이 맺은 결실인 셈이다.
한국문학 전공인 김 실장과 함께 건축공학과 염상훈·성주은 교수가 실무를 주도했다. 성 교수는 “아늑하고 소박한 기숙사의 공간감을 살리는 게 중요했다”고 말했다. 1층 중앙 복도에 서면 양 옆으로 늘어선 전시실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빛이 보인다. 윤동주 시절에도 저녁이면 방마다 두런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불빛이 새어 나왔을 터. 전시실이 된 호실 출입구마다 정확한 위치와 각도로 조명을 설치해 그 장면을 재현했다. 이 광경 자체가 기숙사 생도 윤동주의 시선을 추체험하는 일종의 참여형 전시물이다.
윤동주도 글에서 언급한 창(窓)이 설계의 출발점이었다. 층마다 모양이 다른 창문은 캠퍼스에서 둘째로 오래된(1922년 건립) 이 건물의 얼굴과도 같지만 거기로 들어오는 빛은 대부분 종이류인 전시물 보존에 불리한 조건이었다. 해법은 서랍. 관람객들이 창문과 빛을 마주할 수 있도록 창을 따라 관람 동선을 배치하고 전시물은 창에서 떨어진 쪽의 서랍장에 넣었다. 얇은 서랍이 차곡차곡 포개진 모습은 윤동주가 내면에 형성한 사상적 층위의 은유로도 읽힌다. “시라는 결과물만 받아들이면 윤동주를 표면적으로 이해하게 될 수도 있어요. 국내 박사급 연구논문 수준에서 밝혀진 윤동주 관련 사실들은 서랍 안에 거의 담았습니다.”(김성연 실장)
3층의 ‘도머창(dormer·지붕창)’은 가장 사랑받는 공간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후보 중 하나다. 경사 지붕 아래 공간을 넓게 쓰고자 돌출시킨 도머창은 주택 같은 생활 공간에서 자주 보이는 디테일이다. 염상훈 교수는 “생활 공간이 아니었던 대학본부 건물과 달리 기숙사였던 이곳엔 도머창이 쓰였다”고 했다. 이곳은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천천히 시를 음미하는 공간으로 꾸며졌다.
1층 끝 호실에 윤동주의 방이 조성돼 있다. 달력의 1938년 7월 25일은 첫 기말고사를 마친 날짜. 침대 위의 책보는 방학을 맞아 윤동주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책을 가져다 줬다던 동생들의 회고를 반영한 것이다. 구성 가능한 시나리오에 따라 앞으로 이 방의 풍경은 바뀔 예정이다. 등단 문인이 아니었던 학생 시인은 스스로에 대한 기록을 거의 남기지 못했고 그의 삶은 주변인의 회고 같은 2차 자료를 통해 규명돼 왔다. 그런 의미에서 이 방은 재현된 세트장이 아니라 우리가 시인과 대면하는 방식을 재확인하는 현장이다. 채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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