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튀기는 美 액션 영화인데, 왜 '강남 좌파'가 떠오르지?
우파 잔혹하게 살해하며 '캐비어' 음미
차별받는 흑인은 사냥감 목록에서 빼주기도
뉴욕타임스 "암울한 풍자"
11명의 낯선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들판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영화 시작 5분도 안 돼 절반이 사라진다. 총에 맞아 죽고, 달아나다 부비 트랩에 걸려 죽고, 지뢰를 밟아 터져 죽는다.
한국 넷플릭스에서 지난 달 24일 공개된 미국 액션 영화 ‘헌트’(원제 the Hunt)에선 살인 장면이 수도 없이 나온다. 들판에서 게임처럼 인간을 사냥하는 모습에 ‘헝거게임’(2012)이 떠오르기도 한다. 내장이 튀어 나오고, 반 토막 난 육체로 수다를 떠는 장면에 B급 슬래셔물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외피일 뿐이다. 사냥감이 보수 유튜버와 극우 성향 백인들이고, 이들을 공격하는 인물이 좌파 자유주의자들이라는 설정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이다. 누구보다 잔혹하게 사람을 사냥하고 살해하는 인물들이 한 편으로는 정의와 인종차별 반대, 젠더 이콜리티 등을 내세우는 말끔한 체형의 성공한 미국식 자유주의자(리버럴)들이다. 지난해 개봉 당시 미국 뉴욕타임스로부터 “올해 가장 양극화되고 악명 높은 영화 중 하나...보수파 그룹이 가학적인 자유주의자들의 스포츠를 위해 납치되고 사냥되는 암울한 풍자”라는 평가를 받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국내에서도 “‘좌파가 우파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사냥한다'는 발상이 신선하다”, “무슨 일을 해도 착한 척 하는 좌파의 위선을 짚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어느 날 채팅방에서 수다를 떨던 친구 사이인 유명 기업 CEO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맨션’ ‘사냥’ 같은 이야기를 꺼낸다. 이들은 우리로 치면 ‘강남 좌파'. 큰 실수였다. 이 때문에 ‘좌파가 우파를 사냥한다’는 루머가 퍼진 것. 이들은 속해 있던 기업과 재단에서 쫓겨나는 처지가 된다. 그리고 헛소문이라 치부했던 계획들을 하나하나 실행에 옮긴다. 블룸하우스 제작영화답게 극히 잔인하고 충격적이다. 사냥꾼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무기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은 핑계일 뿐 공정한 대결이 될 수는 없다.
관객들은 사냥감 리스트를 작성하면서 흑인은 배제할 정도로 ‘정치적 올바름’(PC·Political Correctness)을 신봉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쓴 웃음을 짓는다. 이런 장면도 있다. 저택 주방에서 주인공 크리스탈(베티 길핀)과 격투를 벌이던 여성 기업인 아테나(힐러리 스왱크)가 자신을 향해 날아든 최고급 와인병이 바닥에 떨어질까 봐 온몸을 던져 받아내고, 기내식을 서비스하는 여승무원에게 “캐비어 먹어봤냐?” 묻고선 “못 먹어봤다”는 말에 은근히 만족스러워하는 모습들... . ‘캐비어'란 소재를 꺼낸 것은 너무 직접적이지만, 입으로는 성평등을 추구하고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이들의 태도에 깃들어 있는 이중적 태도를 비웃고자 하는 의도가 읽힌다. 이런 세세한 설정과 의도를 숨긴 대화는 영화 곳곳에 숨어 있다. 납치된 사람들이 처음 눈 떴을 때 보이는 상자를 열면 돼지가 한 마리 나오는데, ‘스노우볼’이라고 한다. 또 좌파를 상징하는 아테나가 졸지에 우파 여전사가 된 크리스탈을 ‘스노우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크리스탈이 “왜 내가 스노우볼”이냐고 묻자, 아테나는 “너 ‘동물농장’의 스노우볼이야”라고 대답한다. 이에 크리스탈이 비유가 적절하지 못하다고 지적하자, 아테나는 “동물농장을 읽었냐”고 놀라서 반문하는 모습도 재밌다. 이런 장면들은 뭔가 아는 체 하지만 정작 책은 읽지 않는 어떤 부류들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선 이런 깨알같은 풍자와 디테일을 이해 못 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2019년 영화 개봉 직전에 이를 공화당 비판 영화로 잘못 이해하고 트위터에서 영화를 맹비난한 것도 또다른 코미디였다. 이 영화의 원제가 ‘레드 스테이트 대 블루 스테이트(Red State VS Blue State)’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 하다. 제목 자체가 노골적으로 공화당이 강세인 주(Red State)와 민주당이 강세인 주(Blue State)의 대결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선을 앞둔 시기에 엘리트 민주당 지지자와 공화당 지지자들이 대결하고, 민주당 지지자들이 공화당 지지자들을 일방적으로 사냥하는 이야기이니, 공화당 소속 대통령인 트럼프가 가만 있기는 더욱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국내 넷플릭스에 1월 마지막 주 공개된 이 영화는 현재 ‘오늘 한국에서 콘텐츠’ 순위 4위(2일 기준)를 달리고 있다. 미국의 잘난 체하는 리버럴에 대한 염증 못지않게, 국내에서도 강남 좌파에 대해 풍자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미국 비평사이트 ‘로튼 토마토’도 평론가들은 그리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린 반면, 관객들 사이에선 ‘꽤 볼만하다’는 평가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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