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화이부동]부족국가 대한민국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2021. 2. 3.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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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나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가장 든든한 사람들은 누굴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가족, 친척, 친구일 게다. 친구엔 동네(고향) 친구와 학교 친구가 있다. 혹 이름을 꼽아 본다면 거의 대부분 혈연, 지연, 학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일 게다. 이런 연고는 개인적으론 행복의 근원이지만, 우리는 사회적으론 연고주의에 대해 좋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른바 ‘공사(公私) 구분의 원칙’ 때문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어느 공직자가 큰 어려움에 처한 친구에게 자기 돈을 주는 건 아름다운 일이겠지만,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금전적 특혜를 주는 건 범죄행위다. 돈뿐이겠는가? 친구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의 유형은 다양하다. 어떤 도움이건 공사를 엄격히 구분해서 줘야 한다는 게 우리 사회의 합의이지만, 그런 합의가 잘 지켜지고 있는 것 같진 않다. 연고주의를 넘어서 아예 부족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말이다.

원시시대의 부족사회에선 연고를 따질 필요가 없었다. 부족이 곧 한 덩어리의 연고집단이었으니까. 한 부족이 다른 부족들과의 전쟁이나 갈등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자신의 부족에 대한 맹목적 충성이 필요했다. 세상이 발달하면서 부족사회나 부족국가는 사라졌지만, 그런 ‘부족 본능’은 살아남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로운 부족을 만들어 공동의 이익을 도모하는 마피아 집단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국 엘리트 집단에서 부족주의는
이념을 초월한 ‘최상위 개념’
명분·당위의 포장을 더 앞세우며
‘운동권 부족주의’를 드러낸 진보
그들이 윤미향·박원순 사건에서
맹목적 지지를 실천하는 모습이
정말 무섭고 징그럽다

부족주의는 부정적 의미로 쓰이는 게 일반적이지만, 그 장점을 옹호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에 비해 개인주의가 발달했던 서양에서 그런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개인주의의 한계와 폐해에 질린 탓일까? 프랑스 사회학자 미셸 마페졸리는 <부족의 시대>라는 책에서 “부족주의는 경험적으로 어떤 장소에 대한 소속감, 그리고 어떤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고 말한다. 미국 철학자 스티븐 아스마는 <편애하는 인간>이란 책에서 자신의 부족에 대한 “편애가 인간의 행복을 상당히 증진시킨다”는 점을 강조한다.

나는 아스마의 책을 읽다가 “좌파는 편애가 없어지지 않으면 ‘열린 사회’는 이뤄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라고 단언하는 대목에서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서양의 부족주의엔 좌우 차이가 좀 있는지 몰라도 한국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편애와 연고주의를 포함하는 부족주의는 이념의 좌우를 초월하는 최상위 개념이다.

엘리트 집단일수록 부족주의 성향도 강하다. 아니 한국 엘리트의 본질적 속성은 부족주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정’을 목숨처럼 알아야 할 공정거래위원회는 매년 10여명을 대기업에 재취업시켜 주면서 ‘억대 연봉 지침’까지 기업에 정해준 것으로 밝혀져 세상을 놀라게 만든 적도 있다. 우리는 수십년째 대표적인 부족주의 관행이라고 할 수 있는 ‘전관예우’나 ‘관피아(관료+마피아)’의 심각한 문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듣고 있지만, 그게 사라졌거나 개선됐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참으로 희한한 일 아닌가? 세 번째의 진보정권을 맞이했지만, 진보나 보수나 그 점에선 한통속이라는 게 흥미롭지 않은가? 물론 이유는 간단하다. 최악의 부족주의는 정치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똥 묻은 개가 어찌 겨 묻은 개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이 정도면 대한민국은 ‘부족국가’라고 불러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한국의 부족주의에 좌우 차이가 있다면, 그건 이해관계의 충실도 수준이다. 보수가 비교적 이해관계에 더 민감하다. 보수 부족주의의 전성시대는 박근혜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친박’의 정도를 따지며 온갖 유형의 부족들이 난무했던 2015년이었다. 진박(진짜 친박), 가박(가짜 친박), 용박(박근혜를 이용만 하는 친박), 원박(원조친박), 범박(범친박), 신박(신친박), 복박(돌아온 친박), 홀박(홀대받는 친박), 멀박(멀어진 친박), 짤박(잘린 친박) 등 끝모를 박타령이 울려 퍼졌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런 박타령은 보수의 제 무덤을 파는 격이었던지라,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우리 모두 다 알고 있는 바와 같다.

험난한 반독재 투쟁의 과정에서 성장한 진보는 좀 다른 유형의 부족주의에 빠져들었다. 끈끈한 동지애가 없었다면 결코 해낼 수 없는 투쟁의 과정에서 탄압이 모질고 동지애가 강해질수록 우리편과 반대편의 경계를 선명하게 나누는 선악 이분법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문재인 정권의 주체이자 핵심세력은 바로 그런 민주화 운동가들이다. 독재정권 시절 그들의 투쟁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용기가 없어서 나서지 못했던 사람들은 나름의 ‘역사적 부채의식’을 갖고 있기에 그들이 권력을 잡아 국정운영을 하는 것에 대해 뜨거운 지지를 보냈다. 한국인들은 ‘공정 유전자’가 강한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국정운영을 반독재 투쟁 하듯이 하면서 ‘운동권 부족주의’를 유감없이 드러내 보이는 게 아닌가. 보기에 흉한 부족주의 스캔들이 많았지만, 가장 대표적인 게 바로 ‘윤미향 사건’과 ‘박원순 사건’이었다. 이 두 사람은 그야말로 진보의 가치를 위해 오랜 세월 헌신하면서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적잖은 업적을 이뤘던 분들이다. 그래서 이분들과 직간접적인 인간관계를 맺었던 지지자들이 느낀 충격이 그만큼 컸을 게다. 그러나 충격이 크다는 게 곧장 부족주의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두 사건과 관련해 수많은 진보 인사들이 양산해 낸 발언들 중엔 개탄을 자아내게 하는 것들이 많았다.

비판보다는 이해를 해보고 싶었다. 내가 살펴본 몇 사람은 ‘박원순 사건’에 대해 느낀 심한 우울감을 토로했다. 개인적인 관계가 깊었던 이들은 어쩌면 자신의 일부가 무너져 내린 듯한 고통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예전 같으면 그런 우울과 고통을 개인적으로 삭일 시간이 있었을 텐데, 때는 바야흐로 ‘SNS의 시대’인지라 자신의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감정을 곧장 비판자들에 대한 반감의 형식으로 표출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건은 피소 사실 유출과 관련해 ‘여성단체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어느 ‘여성단체 막내 활동가’는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몸담았었거니와 피소 사실 유출의 통로가 된 한국여성단체연합 건물 앞에 이런 내용의 대자보를 붙였다. “여성단체는 정치적인 이익에 눈이 멀어 박원순 서울시장 사건에 있어 가해자와의 함께하기를 택했다.” 2030 여성이 주축이 된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는 “이번 사건으로 십수년간 여성단체 대표 경력으로 민주당 비례선거에 영입되어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그렇게 형성된 인맥이 여성주의 사회 견인을 위한 정치적 과제 수행의 임무보다 진영 구축에 이용된 결과를 확인했다”고 비판했다.

아,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일까? 페미니즘의 선구자들마저 ‘정치적 부족주의의 노예’가 되었다는 뜻일까? 정치적 부족주의를 위해선 페미니즘의 가치를 저버릴 수도 있다는 건가? 수십년간 피땀 흘려 쌓아올린 그 공적 금자탑을 부족주의 정서 하나로 그렇게 쉽게 날려 버려도 괜찮은 건가? 부족주의가 정말 무섭고 징그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때는 바야흐로 진보 부족주의의 전성시대다. 몇 년 전 보수 부족주의의 전성시대와 다른 점이 있다면, 명분과 당위의 포장을 더 앞세우고 더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부족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일 게다. 많은 사람들이 ‘맹목적 지지’를 실천하는 부족주의의 수렁으로 깊이 빠져드는 걸 보면, 앞서 소개한 마페졸리와 아스마가 괜한 말을 한 건 아닌 것 같다.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엔 어떤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 중요하며, 그런 소속감을 기반으로 한 편애가 행복을 증진시킨다는 말을 믿어야 할까?

믿더라도 ‘공사 구분의 원칙’은 따져봐야 하는 게 아닌가? 사실 공직을 맡는 건 두려운 일이다. 아니 그렇게 여겨져야만 한다. 자신의 부족주의 DNA에 결사적으로 저항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적 영역에서조차 부족주의 정서에 투항하는 것이 자신의 신분 상승과 출세에 도움이 되는 걸 어이하랴. 좀 더 나은 부족에 속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오늘의 한국을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은 지긋지긋하다. 하지만 그런 부족주의를 증오해야 할 보통사람들마저 엘리트 부족 전쟁에 참전해 싸우고 있으니, ‘부족국가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게 우리 모두의 행복일까? 부족 사랑, 좀 적당히 하자.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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