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운찬 칼럼]손상익하가 공공성이다
[경향신문]
< 損上益下 : 위를 덜어 아래에 보탬 >
지난달 택배가 왔다. 상·중·하 3권이 하나의 책집에 담긴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지난해 3월 세상을 뜬 이이화 선생의 유작이다. 유족이 보내준 책을 받고 보니 선생의 빈자리가 더 휑하게 느껴진다. 생전에 출간됐다면 선생은 자필로 서명한 책을 건넸으리라. 그러나 지금 선생은 가시고, 책 안쪽 표지는 하얀 공백으로 남아 있다.
100권이 넘는 저서를 남긴 이이화 선생은 신간을 낼 때마다 서명과 함께 경구를 적어 주위 사람들에게 선물했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주로 ‘마부작침(磨斧作針)’ 네 글자를 썼다.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들 듯이 부단히 노력하라는 뜻이다. 사회에 뛰어든 성인들에게는 ‘손상익하(損上益下)’를 즐겨 써주었다. ‘손상익하’는 불평등한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선생이 건넨 잠언이었다.
‘손상익하’의 출처는 <주역>이다. <주역>은, 3000여년 전 중국에서 희로애락, 길흉화복, 생로병사 등 인간 삶의 조건들을 64가지의 이미지(괘·卦)로 풀어낸 책이다. 처음에는 점서로 쓰였지만 후대에 주석과 해설을 가하면서 인간과 자연을 이해하는 철학사상서로 자리 잡았다. ‘손상익하’는 주역 64괘 가운데 42번째인 ‘익(益)’ 괘에 대한 공자의 주석에 나온다. ‘익 괘는, 위를 덜어 아래에 보태는 일이니 백성들의 즐거움은 끝이 없다(益, 損上益下 民說无疆).’ 이익이란 무엇인가라는 옛사람의 물음에 공자가 제시한 해답은 ‘손상익하’였다. 여유 있는 자는 자신의 것을 떼어 부족한 사람에게 주라는 ‘손상익하’는 소유욕을 본성이라면서 더 채우려 하는 요즘 세상에서는 낯선 어휘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수천년간 공공의 이익을 구현하는 이념으로 활용됐다. 전통시대 공익이나 공공성을 얘기할 때마다 등장한 말이 ‘손상익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그랬다. 흉년이나 전염병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피폐해졌을 때, 지식인과 정책입안자들은 국가와 사회의 운영 원리로 ‘손상익하’의 이념을 적극 채용했다. 국가에서는 세금을 줄이거나 부역을 면제해주고, 왕실에서는 내탕고를 풀어 백성을 구휼했다. 특히 영조와 정조 같은 임금은 ‘손상익하’ 이념을 적극적인 재분배 정책으로 이끌어냈다. 조세·부역을 경감하는 대신 국가 재정의 규모와 지출을 줄여나갔다. 천민과 양민이 지던 국가의 부역을 사대부 등 양반에게도 부과하자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손상익하’가 민생을 돌보며 사회통합을 이뤄내는 공공의 담론으로 유통됐던 것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자영업자 등의 재난피해 구제 방안을 놓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가장 손쉬운 피해 구제책은 정부가 계속 돈을 푸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세 차례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면서 재정은 한계에 다다랐다. 언제까지 추경과 국채 발행에 의존할 수는 없다. 지원 대상·방법을 두고도 의견이 엇갈린다. 노래방·헬스장 등 집합금지·제한 조치로 손해를 본 자영업자에 한정할지, 비정규직·일용직·프리랜서 등 노동자들도 포함시킬지 정해야 한다. 코로나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마냥 각자도생 경제체제에 맡겨둘 수도 없다. 지속 가능한 재난 구제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재난피해가 불평등하게 미치는 ‘K자형 양극화’로 부익부빈익빈이 심화하고 있다. 지난해 마이너스 성장 속에서도 삼성전자와 같은 거대기업과 네이버·카카오와 같은 플랫폼 IT업체는 오히려 더 많은 영업이익을 올렸다. 그렇다고 이들 기업의 성과급 잔치에 배 아파할 필요는 없다. K자형이 전 계층이 피해를 보는 L자형보다는 낫다. 초과 이익을 해당 기업뿐 아니라 사회에 미치도록 하면 된다. 위기 상황에서 돈을 번 이들이 스스로 덜어내야 한다. 자발적으로 동참하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법과 제도로 나누도록 해야 한다.
때맞춰 정부·여당에서 이러한 취지의 ‘상생연대 3법’(자영업 손실보상법, 협력이익공유법, 사회연대기금법)을 추진한다고 한다. 이들 제도가 자유시장주의에 위배된다는 비판은 접어두자.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유럽·미국조차 반시장적인 부유세를 꺼내들고 있는 실정이다. 경제란 시장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누구든 재난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스스로 덜어내는 일이 당장 개인에게는 손해일지 모르지만, 사회 공동체로 보면 이익이다. 공자는 이런 말도 남겼다. “스스로 덜어내는 자는 반드시 더해지는 것이 있고, 스스로 보태는 자는 반드시 실패하게 된다”(<공자가어>). 지금이 ‘손상익하’의 정신을 실천할 때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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