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어두운 터널 끄트머리에서 깨달은 것
[경향신문]
학생시절부터 각별했던 이들과 오랜만에 즐겁게 웃었는데, 기분 상하거나 슬플 일 하나 없었는데, 헤어져 돌아오던 길에 심장이 에여왔다. 가만히, 정적 가운데 내면에서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이 관계가 예전 같을 수 없을 것임을, 누구의 탓도 아니지만 우리는 매끈하고 예의 바르게 서로에게서 멀어질 것임을 예감했다. 그 예감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될까봐 난 겁이 났다. 생각하면 표현하고 싶어질 테고, 표현하면 소중한 감정이 휘발될 것 같아서. 생각을 끄기 위해 라디오를 켰다. 영화 <화양연화>의 주제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3년 전 봄밤이었다.
그날 생각지 못한 연락을 받았다. 학술 연재를 함께하며 가까워진 선생님이 제주에 오셨다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다음날 저녁, 버스 타고 아랫마을로 향했다. 직접 꺾어 손질한 고사리를 한 움큼 갖다 드리고, 선생님과 동료 분들의 담소에 잠시 끼어들어 사회·문화사의 재미난 일화들을 들었다. ‘하이볼’이란 술도 처음 마셔봤다. 취기가 조금 오른 나는 며칠 전 위내시경 검사 후 아기같이 깨끗한 위를 가졌다고 의사선생님에게 칭찬 들었다며 뜬금없이 자랑했다. 아기의 위를 가진 기념으로 한잔 더 마시고.
그다음 날은 오후 늦게까지 수업하고서 교내식당 닫기 10분 전에 뛰어갔다. 좋아하는 달걀말이가 반찬으로 나와서 한 조각 더 주십사 부탁드리니 배식하던 아주머니가 남은 세 조각 전부 내 식판에 올려주셨다. 잠시 후 마감 중인 배식구로 누가 급히 달려왔다. 친한 동료였다. 그의 몫이었어야 할 달걀말이를 내가 먹어치운 게 미안해져 대신 후식을 사기로 했다. 원래 둘 다 시간 절약하고자 ‘혼밥’했던 건데 등나무 아래서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또 한참 웃고 떠들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지금, <화양연화>의 주제음악을 들으며 떠오르는 건 ‘매끈하고 예의 바르게 멀어질’ 것임을 직감하고 슬퍼했던 순간이 아니다. 그때의 감정은 이미 흐릿해졌고 통각 역시 무뎌졌다. 현재 그리움으로 각인된 건 그날이 아니다. 다음 날과 그다음 날의 사소하고 시시한 웃음들이다.
스물 몇 살에 <화양연화>(왕가위·2000)를 볼 때는 서로에게 차츰 매료되던 두 주인공이 공간을 빌려서 함께 무협소설을 집필한다는 설정이 당혹스러웠다. 가령 차우(양조위)가 진지하면서도 수줍게 “무협소설을 써보려 하는데 도와줄 수 있을지” 묻거나, 첸 부인(장만옥)이 “저 없이도 잘만 쓰시잖아요”라고 답하는 장면 말이다. 조명이 어두운 붉은 방에서 시나리오도 서정시도 아닌 무협지 원고라니 산통 깨는군 싶었다. 작품 분위기에 맞지 않는 옥의 티라고 생각했더랬다. 십 수 년 지나 재개봉한 영화를 다시 관람하며 이번에는 동일한 장면과 대사가 아프게 닿았다. 저토록 허술한 가면 뒤에 숨어 마음의 일렁임을 감추려 했다니. 상대방과 스스로를 속일 수 있으리라 믿었다니. 각자 사랑하는 이에게 배신당하고 캄캄한 데에 버려졌다 낙담했을 날들이 도리어 그들의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시절이었다. 당시엔 미처 알지 못했겠지만. 아니, 인정할 수 없었겠지만. 잃은 대상에 대한 당위적인 그리움에 갇힌 채 무협소설 운운하며 애써 마음을 부정하던 그때, 둘은 화양연화(花樣年華)를 관통 중이었던 거다. 어두운 터널 끄트머리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깨닫는 듯하다. 그 터널이야말로 찬란했음을. 그리움에 사로잡혀 뒤돌아보던 우리 머리 위로 반짝이는 순간들이 하늘의 별처럼 가득했었다는 사실을. 이 역시 훗날 또 다른 그리움으로 남을 것임을.
나는 안다. 끝이라 생각해온 어느 지점은 끝이 아니다. 거기에 빛나는 것들이 새로이 채워 넣어질 것이다. 두근거리며 기다릴 무엇이 더는 남아있지 않을 것만 같은 시기에도 우린 저마다 아름다운 시절을 하나 더 통과하는 중일 수 있다. 어쩌면 오늘도 그럴지 모른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대통령실 “김 여사, 다음 순방 동행 않기로”…이후 동행 여부는 그때 가서 결정
- 명태균 “청와대 가면 뒈진다고 했다”…김건희에게 대통령실 이전 조언 정황
- 김예지, 활동 중단 원인은 쏟아진 ‘악플’ 때문이었다
- [속보] “아내 순진…잠 안 자고 내 폰 봐서 ‘미쳤나’ 그랬다” [대통령 기자회견]
- [제주 어선침몰]생존자 “그물 들어올리다 배가 순식간에 넘어갔다”
- [트럼프 2기]트럼프 당선 이후 유산유도제 수요 급증···임신중단권 제한 우려
- ‘프로포폴 불법 투여’ 강남 병원장 검찰 송치···아내도 ‘중독 사망’
- 이마트 “가을배추 한포기 1661원”
- 주말 서울 도심 대규모 집회…“교통정보 미리 확인하세요”
- 대구 한 아파트서 부부 숨진 채 발견…경찰 “외부 침입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