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눈] 정치가 덮은 사회

이우승 2021. 2. 2. 23:4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우리사회 '脫진실의 시대'로 진입
이념성향 따라 입장 극명히 갈려
사실보다 정치·진영 논리 앞서
사회통합 저해.. 민주주의 위기로

세계일보가 창간 32주년을 맞아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우리 사회가 이념적 성향에 따라 얼마나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 사면이나 문재인정부 탈원전 정책,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중립성 등 민감한 사안은 모두가 예상할 수 있듯이 보수와 진보의 답변이 엇갈렸다. 사회·경제적인 현상에 대해서도 놀라울 정도로 응답의 찬반이 갈렸다. ‘자녀 세대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 가능성’을 묻는 말에 보수층 응답자(316명)의 80.3%가 “낮다”고 답했다. 진보라고 분류한 응답자(279명)의 49.1%는 “높다”고 했다. 보수층(15.1%)이나 중도층(29.1%)보다 월등히 높은 비율이다. 소득 불평등을 묻는 말에서도 이념 성향이 보수적일수록 심화했다고 답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는 극명했다. 보수층 10명 중 6명은 “퇴보했다”, 진보층 10명 중 6명 정도는 “발전했다”로 팽팽했다.
이우승 정치부장
이념적으로 획일화된 사회가 건강한 것은 아니다. 다양한 편차는 존재하지만 전체적으로 가운데가 탄탄한 단봉 형태가 바람직하다. 사회 통합이 용이하고 그만큼 갈등 요소를 줄일 수 있어서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는 양 끝단에 있는 두 개의 탑이 마주 보는 형태다. 사회 통합을 저해하는 이 같은 극단적인 양극화는 자유민주주의에 위협이 된다.

정상 궤도를 벗어난 우리 사회가 ‘탈진실’(Post-Truth)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는 경고음을 발산하고 있다. 존재하는 사실(fact)은 이념과 감정에 종속된다. 사실이나 진실이 판단기준이 아니라 정치와 진영의 논리가 앞선다. 상황에 따라 사실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사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옥스퍼드 사전은 2016년 이 단어 ‘탈진실’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1일 북한지역 원전 건설 추진 문건을 공개했다. 그러나 정치권의 갈등은 진화되기는커녕 더욱 격화하고 있다. 청와대가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정상회담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건넸던 USB(휴대용저장장치)가 공개되고, 그 안에 원전 관련 내용이 담겼든, 담겨 있지 않든 논란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서다.

박순철 전 서울남부지검장은 지난해 10월 추미애 전 법무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 간 갈등을 비판하며 “정치가 검찰을 덮었다”고 일갈하고는 검사복을 벗었다. 박 전 검사장은 “정치와 언론이 각자의 프레임에 맞추어 국민들에게 정치검찰로 보여지게 하는 현실이 매우 안타까울 뿐”이라고 토로했다.

탈진실의 시대, 박 전 검사장의 말처럼 정치가 사회를 덮었다. 정치의 본질은 투쟁이다. 정당은 정권 획득을 목표로 모인 사람들의 결사체다. 그만큼 냉혹하다. 자유민주주의는 폭력을 동반하지 않고 정권 탈취를 가능하게 해주는 체제다. 그러나 정치가 덮은 사회에서는 잔혹한 정치의 본질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중국 혁명의 영웅이자 국가주석이던 류사오치는 1969년 카이펑의 한 콘크리트 창고 방에서 벌거벗은 채 고열과 구토의 고통 속에서 숨졌다. 죽은 뒤에도 가명의 ‘무직’ 노인으로 화장됐다. 냉혹한 정치의 일면을 이야기할 때 흔히 드는 사례 가운데 하나다.

여기서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당시 한 일간지 르포기사를 소개한다. 한 기업체 실업팀의 운동선수 A가 있었다. 국가부도니 정리해고니 하는 소식이 들려왔다. 운동하는 자기와 다른 세계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업은 A가 있는 운동팀부터 없앴다. A는 영문도 모른 채 거리에 나앉았다. 지방 중소도시 소시민 B는 대기업이 망하고 기업이 줄도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울의 잘난 사람들이 잘난 척한 값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희망이던 자식이 대학 졸업 후에도 갈 곳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B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이 글의 말미에 20년도 더 지난 이야기를 꺼낸 것은 IMF 위기가 이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왔듯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위기도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다.

이우승 정치부장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