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보의 국립극단 3년, 화두는 "세대교체"

글 문학수 선임기자·사진 우철훈 선임기자 2021. 2. 2.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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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예술감독 인터뷰

[경향신문]

30~40대 진취적 후배들과 TF 꾸려
공연작·현장 소통·운영 방안 논의
블랙리스트 피해자 명예회복 등
‘국립’ 무게 담은 다양한 플랜 제시

국립극단은 무엇인가. 한 나라의 연극을 대표하는 극단이라는 ‘큰 틀의 정의’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국립극단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들어가면 의견이 분분해진다. 최근 국립극단 사무실에서 만난 김광보 예술감독도 그 지점을 털어놨다. “오늘이 부임한 지 79일째입니다. 이제야 털어놓습니다만, 작년 9월에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제안을 받았습니다. 굉장히 부담스러웠죠. 국립극단에 대한 생각과 요구가 다들 다를 텐데, 제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 두려움이 왈칵 몰려왔습니다. 게다가 국립극단에는 지난 정부 때 저질러진 블랙리스트 상황에서의 원죄가 있습니다. 그 모든 걸 헤쳐나갈 수 있을지, 솔직히 겁부터 났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다. 며칠 고민 끝에 그는 “나 혼자 생각할 게 아니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했다. “진취적 입장을 지닌 연극인들, 주로 30~40대 후배들과 TF를 꾸려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레퍼토리 추천위원회’, 마지막으로 ‘현장소통 자문위원회’를 만들어 또 의견을 모았습니다. 올해 공연할 20편의 작품을 고른 것도, 저 혼자 한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번거로운 과정일 수 있다. 자신의 비전과 의지대로 극단을 이끌면 될 텐데 왜 복잡하게 일을 풀어나간 걸까. 과거의 김광보, 이를테면 국립극단으로 오기 전 5년간 재임했던 서울시극단 시절의 김광보라면 이러지 않았을 터이다. 2015년 서울시극단 예술감독 취임 직후 경향신문과 만난 그는 “내 스타일이 서울시극단의 특징이 될 것”이라며 선명하고 강한 발언을 내놓은 바 있다. 하지만 광화문(서울시극단)에서 서계동(국립극단)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었다. “저, 여기 와서 완전 ‘쫄보’ 됐습니다”라고 농을 치며 웃었다.

그렇게 사비를 털어가며 구성했던 ‘위원회’를 거쳐 국립극단의 ‘플랜’이 다듬어졌다. 지난 18일 공개된 국립극단 운영 방안과 사업에 많은 항목이 만들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연극의 평등한 향유” “새로운 담론의 수용” “표현의 자유” “블랙리스트 피해자의 명예 회복과 사례집 발간” “기후·환경에 관한 연극 제작” “온라인 극장 오픈” 등 여러 가지가 눈에 띈다.

물론 다 좋다. ‘국립’의 짐을 짊어지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김광보 시대’를 짧고 굵게 가름할 어젠다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 그래서 이날의 인터뷰는 그에게 그 한마디를 ‘추궁’하는 자리였다. 임기 3년의 예술감독을 수락하면서 마음에 품고 있는 ‘칼’이 없을 리 없다. 결국 그가 털어놓은 네 글자는 “세대교체”였다.

“궁극적인 화두는 그것이겠죠. 제가 지금 50대 후반, 연극동인 ‘혜화동1번지’ 2기 출신입니다. 저희 그룹이 나름 주목받으면서 활동한 시기가 1990년대부터입니다. 벌써 오래 됐죠?(웃음) 이제 후배들에게 바통을 넘길 때입니다. (어느 연배?) 제 바로 밑의 세대보다 좀 더 밑의 세대입니다. 대학로에선 이미 교체가 이뤄졌는데 국립은 걸음이 좀 늦습니다.”

‘국립극단 예술감독’이라는 중책을 맡은 그도 한때 ‘신인’이었다. 부산 태생인 그는 스무살 되던 해, 어느 건물 벽에 나붙은 ‘단원 모집’ 공고를 보고는 무작정 극단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불합리한 운영에 항의”하다가 3개월 만에 퇴출당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기백만 살아 있던 청춘이었다. 이어 부산의 ‘부두연극단’에 들어갔고 가마골 소극장 무대에 배우로 섰다. 물론 배우만 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조명’이 그에게 주어진 가장 큰 역할이었다.

1988년에는 부산문화회관에 ‘조명기사’로 취직해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됐다. “월급 따박따박 받으면서 2년” 일했다. 하지만 “무대예술가의 꿈이 소진되는 답답함”에 1990년 서울로 올라왔다. 연출 데뷔는 그러고도 몇 년 뒤였다. 1994년 4월 공연했던 <지상으로부터 20미터>(장우재 작)가 데뷔작이었다. 직후 극단 ‘청우’를 창단했고, 이듬해 5월 창단작으로 <종로고양이>(조광화 작)를 공연했다.

“몇 해 뒤 IMF가 왔잖아요? 극단 와해되고 참담하게 지내다가, 극단 ‘미추’의 손진책 선생을 찾아갔어요. ‘연극 좀 하게 해주세요’라고 간청했죠. 그때 저는 정말 간절했습니다. 그래서 만든 연극이 <뙤약볕>이거든요. 박상륭 작가의 소설을 제가 각색해서 1998년 5월 문예회관 소극장에 올렸는데, 이 연극으로 한국연극협회, 백상예술대상 등에서 신인연출상을 받았습니다. 오늘의 저를 있게 해준 연극이죠.”

또 24년이 흘렀다. 이제 그는 “세대교체”를 고민하는 ‘선배의 자리’에 서 있다. 올해 국립극단이 공연할 20편 중 단 3편만이 직접 선정한 연극인데, 이 지점에서도 그의 고민이 읽힌다. “영국 극작가 린 노티지의 <스웨트>는 동시대의 문제, 노동문제를 언급합니다. 작년에 코로나19 탓에 제대로 공연하지 못해 다시 선보입니다. 구자혜 작·연출의 <로드킬 인더 씨어터>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의 시선으로 연극을 이끌어가죠. 구자혜는 기존 문법에서 벗어나 매우 자유로운 사유와 글쓰기를 보여줍니다. <앤젤스 인 아메리카>를 연출하는 신유청은 ‘웰 메이드 연극’을 구사하면서도 영민하고 날카롭죠. 텍스트를 읽어내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글 문학수 선임기자·사진 우철훈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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