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하차→뜀박질→현관 탈모→화물엘베.."다단계 배달에 참담"

김도엽 기자,강수련 기자 2021. 2. 2.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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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상인 취급, 집값 떨어질까봐 그런가 보다"
시민단체들 '갑질 아파트' 인권위 진정 제기
2일 서울 시내 T아파트 앞 배달 노동자들의 오토바이들이 '진입금지'가 적힌 입간판 앞에 세워져있다. 2021.2.2/© 뉴스1 강수련 기자

(서울=뉴스1) 김도엽 기자,강수련 기자 = "기분이 더러워져서 강제 배달배정이나 어쩔 수 없는 경우 제외하면 웬만하면 이 아파트 배달은 안 받으려고 해요."

300세대도 되지 않는 서울 시내 고가의 아파트 입구에는 '오토바이 진입금지'가 적힌 작은 입간판이 서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무심코 지나칠 정도로 작은 입간판 앞, 이 아파트로 배달 온 라이더 A씨는 일상인 듯 오토바이를 멈춰 배달을 마친 후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A씨는 아파트 입구 근처에도 가지 못한 채 배달통에서 음식물을 꺼내 뛰어서 현관으로 들어갔다. 건당 수수료를 받아 생계를 유지하는 라이더들에게 시간은 생명인데, 일부 아파트들은 "걸어가라" "헬멧을 벗어라" "화물용 엘리베이터만 타라" 등 배달 과정이 복잡해 유독 배달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2일 뉴스1은 배달 라이더들에게 화물용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게 하며 '갑질'을 한 서울 시내 고가 아파트 5곳을 직접 찾아갔더니 이들 아파트 모두 단지 내 오토바이 진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오후 1시30분쯤 서울 서남권 고가 T아파트에 배달 온 라이더 A씨는 "언론에서 보도하면 뭐하나, 바뀌는 건 하나도 없다"라며 "헬멧 벗고 들어가야 하고, 일반 엘리베이터 키를 안주고 화물용 엘리베이터 키를 주는 건 여전히 똑같다"라고 분노했다.

이어 A씨는 "짐짝 취급당하니 유독 이런 아파트에는 배달하기가 솔직히 싫다"고 덧붙였다.

A씨가 지목한 T아파트는 라이더들이 단지 진입 전 오토바이를 세운 후 1층 로비까지 걸어 들어간 후 헬멧을 벗어 안내원에게 확인시켜주고 '화물용 엘리베이터 키'를 받고 나서야 배달을 할 수 있다.

A씨는 "가장 기분 나쁜 건 '화물용 엘리베이터 타세요'라며 굳이 안내원이 한 번 더 일러주는 말이다"라며 울분을 토했다. 그러면서 인근 H아파트도 이와 비슷한 부류라고 콕 찍었다.

1일 서울 시내 T아파트 앞 배달 노동자들의 오토바이들이 '진입금지'가 적힌 입간판 앞에 세워져있다. 2021.2.2/ © 뉴스1 강수련 기자

서울 동부권에 있는 고가의 T아파트도 상황은 비슷했다. 이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 앞 '택배, 배달, 도우미, 외부인등은 4호기 권장'이라는 문구가 적힌 쪽지가 붙어있다.

아파트 관계자는 "4호기도 1·2·3호기처럼 똑같은 엘리베이터다. 외부인 출입 관리 차원에서 4호기를 권장하는 것이다. (라이더 갑질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곳에 배달 온 라이더 B씨는 그나마 이곳이 강남, 서초보다는 낫다고 말했다. 언론에 갑질 사례가 보도되기 시작한 후 열어주지 않던 출입문도 열어주는 등 그나마 개선됐다는 설명이다.

B씨는 "여기는 오토바이만 제한하지만 강남은 근처도 가지 못하고 진입 자체가 금지되는 아파트가 많다"며 "고객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데 늦게 오면 주문을 놓치는 경우도 종종 있다"라고 한숨을 쉬었다.

강남·서초에서 일하다 이곳으로 옮겨온 라이더도 있다. 라이더 C씨는 "강남·서초에서 3년 일하다 도저히 못하겠어서 여기로 이동했다"라고 말했다. 그나마 이곳이 대우가 나은 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잡상인 취급은 똑같다고 했다. C씨는 "화물 엘리베이터에 타야 하고, 헬멧 벗으라 하고, 여기도 잡상인 취급이다"라며 "우리 같은 사람들이 같은 엘리베이터 타면 집값 떨어질까봐 그런가 보다"라며 체념했다.

'갑질' 당한 라이더들의 사례가 쌓이다 보니 라이더들 사이에서 갑질 아파트에 대해서는 '배달을 거부하자'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A씨는 "라이더들끼리 아파트 배달을 그만하자는 얘기도 여러번 했다. 그런데도 강제 배당건은 피할 수 없으니 차라리 배달료를 더 달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설명했다.

C씨는 "성동, 광진은 라이더들끼리 단합해서 (문제가 된) 아파트를 안 간다고 하니 대우가 많이 좋아진 편이다"라고 밝혔다.

이날 라이더유니온은 배달 라이더들에게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탑승하게 하는 등 갑질을 한 아파트 103곳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다.

라이더들은 "헬멧을 벗기고 화물 엘리베이터를 타게 해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꼈다"거나 "비오는 날 우레탄 코팅 지하주차장이 미끄러워 지상으로 진입하려 했다가 제지당했다"고 분개했다. 아파트들이 라이더의 전화번호를 무단 수집하거나 단지 안을 걸어 배달하게 했다는 제보도 있었다.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서비스일반노조 배달서비스지부도 라이더들에게 갑질을 한 아파트 76개, 빌딩 7곳에 대해 이날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다만 시민단체들은 진정 제기 후에도 갑질을 시정했다는 연락은 단 한 곳도 받지 못했다. 구교현 라이더유니온 기획팀장은 "명단 공개 후 시정했다는 연락이 온 아파트는 없다"고 말했다.

2일 서울 시내 T아파트 앞 배달 노동자들의 오토바이들이 '진입금지'가 적힌 입간판 앞에 서 있다. 2021.2.2/ © 뉴스1 김도엽 기자

dyeop@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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