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만에 기괴하지 않은 대변인 첫 탄생" 백악관 담당 기자들 감격[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정미경 2021. 2. 2.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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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도 달라진 백악관 언론 브리핑

지난달 20일 미국 동부시간 오후 7시. 흔히 ‘프레스 브리핑룸’으로 불리는 백악관 제임스 브레디룸에 긴장감이 흘렀습니다. 조 바이든 시대를 알리는 첫 언론 브리핑이 열리는 시간이었기 때문이죠. 도널드 트럼프 시대 4년 동안 브리핑다운 브리핑을 받지 못한 백악관 담당 기자들은 ‘굶주린’ 표정이었습니다. 1시간 뒤 파란색 원피스의 젠 사키 신임 백악관 대변인이 진행하는 브리핑을 끝낸 이들은 기뻐 날아갈 듯한 얼굴이었습니다.

젠 사키 신임 백악관 대변인의 첫 언론 브리핑. 미국 주요 매체들이 일제히 속보로 전했다. (폭스뉴스)
“이게 얼마만인가! 이런 게 바로 브리핑이지.”

기자들 반응이었죠. 이런 축제 분위기 속에서 폭스뉴스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바이든 시대가 되면 친(親)도널드 트럼프 성향의 폭스뉴스는 완전 찬밥 신세가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중재자 역할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죠.

트럼프 시대에는 총 4명의 백악관 대변인이 있었습니다. 기자들과 싸우거나(숀 스파이서, 사라 샌더스), 아예 브리핑을 안 하거나(스테파니 그리셤), 지나치게 트럼프 찬양 일색이라 기자들이 브리핑을 보이콧(케일리 매커내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그러니 사키 대변인의 ‘정상적인’ 브리핑을 접하게 된 기자들이 감격스러워한 것은 당연합니다. 몇몇 기자들이 소셜미디어에 올린 반응을 볼까요.

“사키 대변인은 단 한 번의 브리핑으로 4명의 트럼프 대변인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기자들의 질문에 답했다.”

“브리핑에서 이렇게 상식이 통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4년 만에 기괴하지 않는 백악관 대변인 첫 탄생.”

사키 대변인의 브리핑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그녀는 단 한 명의 기자도 공격하지 않았다” “기자들을 존중해준다” “기자들의 질문에 모두 답해줬다” 등의 내용이다. (기자 트위터 캡처)
사키 대변인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 국무부 대변인을 지냈고, 이후 CNN 전문가 패널 등으로 활동한 대(對)언론 베테랑. 저도 워싱턴 특파원 시절 국무부 대변인이었던 그녀의 브리핑에 수차례 참석했습니다. 효율적인 운영이 눈에 띄었습니다. 자신이 잘 모르는 이슈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고 실수를 인정한 뒤 “곧 알아봐서 (개인적으로 또는 다음 브리핑 때) 답을 주겠다”고 대안을 제시하는 스타일이더군요. 그러니 많은 기자들에게 질문 기회가 돌아가고 다양한 이슈를 커버할 수 있는 것이죠. 당연한 대변인의 직무라고 할 수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 시절 ‘분노의 브리핑’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습니다.

사키 대변인의 또 다른 특징은 전문가나 담당자를 자주 동석시킨다는 것입니다. 국무부 대변인 시절에는 지역 담당국장 등을 자주 브리핑에 초청해 직접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곤 했죠. 백악관 브리핑 둘째 날에는 앤서니 파우치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 소장과 함께 등장했습니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었겠지만 바이든 행정부의 당면 과제인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퇴치를 위해 전문가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양보한 것이죠. 직접 파우치 소장이 나서 40여분동안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진행한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사키 대변인 체제의 미래가 밝은 것만은 아닙니다. 새 정권과 언론의 ‘허니문(신혼) 기간’은 곧 끝나기 때문이죠. 지난 대선 때 언론의 보도 방향이 “지나치게 바이든 쪽으로 기울었다”는 비판을 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같은 오명을 벗기 위해서라도 미 언론은 바이든 행정부의 정국운영 능력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극우매체와의 관계입니다. 트럼프 대통령 시절 이름도 생소한 케이블TV와 인터넷 언론사들이 대거 주목을 받았습니다. 뉴스맥스, 데일리콜러, 게이트웨이펀딧(이상 인터넷), OAN, 싱클레어(TV) 등이죠. 이들은 대형 언론사도 하지 못한 트럼프 단독 인터뷰를 성사시키며 명성을 키웠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들을 트위터로 홍보하며 선전도구로 활용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절 단독 인터뷰를 성사시킨 극우매체 OAN의 백악관 담당 기자 샤넬 리온. 한국계로 알려진 그녀는 트럼프 대통령을 적극 변호하는 질문을 자주 던져 브리핑룸의 화제였다. (베니티페어)
백악관 취재 시스템은 중층 구조로 이뤄져 있는데요. 우선 ‘출입’ 언론사로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첫 관문부터 통과하기가 쉽지 않죠.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미국과 전 세계에서 100여개 언론사만이 승인을 받습니다. 진짜 핵심은 다음 단계인 브리핑 참석. 우리가 흔히 TV에서 보는 기자들이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질문하는 브리핑룸에 참석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미국 기자들에게는 최고의 영예인 ‘하드 패스(단단한 권한)’를 얻는 것이죠. 브리핑룸은 49개의 좌석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대개 50명 선에서 ‘하드 패스’를 얻습니다. 물론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브리핑 참석 가능 인원이 14명으로 크게 줄었지만요.

현재 바이든 행정부는 출입 언론 선정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트럼프 시대에 ‘하드 패스’를 얻은 극우매체들은 결코 그 권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브리핑에서 바이든 행정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송곳 같은 질문을 퍼붓겠다는 것이죠. 통합을 내세우는 바이든 행정부도 극우매체들의 브리핑 참석 권한을 “일단 유지하겠다”고 합니다.

사키 대변인의 첫 브리핑 때 ‘바이든 가족의 마스크 미착용’ 질문으로 일약 유명해진 폭스뉴스의 피터 두시 백악관 담당 기자(오른쪽). 기자 가족으로 왼쪽은 ‘폭스 앤 프렌즈’ 프로그램의 진행자인 아버지 스티브. (폭스뉴스)
이것이 바로 폭스뉴스가 부각되는 배경입니다. 바이든 행정부와 극우매체들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죠. 친트럼프 계열이지만 극우는 아닌 폭스는 양측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바이든 비판’ 수위를 결정할 수 있는 절묘한 위치에 놓여있습니다.

폭스뉴스의 역할은 첫날 브리핑 때 여실히 증명됐습니다. 이날 사키 대변인은 단 한 차례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는데요. 바로 폭스뉴스 기자의 질문을 받았을 때입니다. 폭스 기자는 “바이든 대통령 가족이 취임식 날 링컨기념관 방문 등 공식 행사를 하는 동안 마스크를 쓰지 않는 적이 수차례 있었다”고 지적했습니다.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 하는 행정명령까지 서명한 바이든 대통령 입장에서는 중대 실수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뼈아픈 지적이죠. 그렇다고 극우 매체의 부정선거 주장처럼 정권의 정통성까지 뒤흔드는 체제 비판 질문도 아닙니다. 이 정도 선에서 행정부 비판이 용납돼야 한다는 것을 폭스뉴스가 보여준 것이죠.

정미경 기자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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