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중국인의 노예 신세나 다름없었던 간도 우리 농민

이진 기자 2021. 2. 2.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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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12월 31일

플래시백

남의 땅을 일궈 먹던 그녀는 어느 날 날벼락을 맞습니다. 지주와 자경단이 있는 곳에 갔던 남편이 총 맞아 숨진 채 아들 봉식에게 업혀온 겁니다. 아버지의 비명횡사에 아들은 집을 나가버리고 ‘내 땅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던 그녀는 어린 딸 봉염을 이끌고 아들을 찾아 헤맵니다. 그러다 용정에서 지주를 만나 딸과 함께 식모살이로 들어가죠. 한숨 돌릴 무렵 지주는 아내가 친정 간 사이 그녀에게 덤벼듭니다. 공산당이 된 봉식이가 공개처형 되자 지주의 아내는 임신한 그녀를 쫓아내죠. 함께 있다간 공산당 혐의를 받는다나요. 그녀는 비 새는 헛간에서 몸을 푼 뒤 남의 집 젖어미로 갑니다. 돌보지 못한 딸과 갓난아이는 열병으로 숨지고 혼자 된 그녀는 목숨을 이으려고 소금 밀거래에 나섰다가 단속반에 걸려듭니다.

일제강점기 작가 강경애가 1934년 발표한 ‘소금’의 줄거리입니다. 1920년대 간도로 밀려난 우리 소작인의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했죠.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 기적 같’고 ‘지독하게 마음먹고 땅을 파보지만 남는 것은 불행과 궁핍’뿐입니다. ‘소금’은 동아일보 1923년 12월 31일자 3면에 실린 ‘간도농촌 우리 동포의 비참한 정경’과 겹칠 정도로 똑같습니다. 우리 농민은 수확의 60%를 중국인 지주에게 내줘야 했죠. 남은 쌀도 봄에 빌린 양식에 이자를 붙여 갚고 나면 바닥났습니다. 세금과 땔감까지 대신 바치고 겨울에는 손발이 얼어가며 지주의 집안일을 돕지만 돌아오는 건 욕설과 몽둥이찜질이었습니다. 부모의 병은커녕 자식 교육도 챙기지 못한 채 빚만 지고 결국 노예가 돼 처자식까지 팔아먹는 신세들이었죠.

자작농이더라도 고달프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경찰은 조사를 나오면 쌀밥에 닭고기부터 내놓으라고 하고 소송을 제기하면 경위야 어떻든 양쪽에서 벌금과 밥값을 달라며 손을 벌렸죠. 문턱을 넘었다고 문턱세를 뜯어갔다니 할 말이 없습니다. 세무직원들은 소에 확인증을 내주면서 이 꼬투리 저 꼬투리를 붙여가며 돈을 우려먹었죠. 송아지 한 마리에 확인증을 다섯 번 만들다보니 그만 송아지가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소금 거래를 관이 독점한 결과 단속반은 무조건 밀거래를 한다고 트집을 잡아 벌금을 거둬갔죠. 이밖에도 빼앗아가는 돈은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 농민의 이런 원통한 현실은 지난해 12월 1일자 ‘붉은 간도땅과 푸른 해란강은 우리 동포의 피와 눈물’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간도는 우리에게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일제와 청이 경쟁하듯 장악하려 했지만 그래도 숨 쉴 공간이었거든요. 서전서숙과 명동학교 같은 교육기관을 세웠고 신흥강습소 같은 독립군 양성기관도 운영했습니다. 일제의 통제가 상대적으로 느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의 대승은 그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일제가 무차별 학살로 보복에 나서면서 우리 농민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죠. 경신참변입니다. 이후 일제는 간도의 불온한 분위기를 가라앉히려고 간도시찰단을 구성해 경성의 달라진 모습을 구경시키기도 했습니다. 총독부 경성우편국 조선은행 연초전매공장 동양척식회사 등을 둘러보게 했죠.

동아일보 1923년 9월 20~21일자 ‘잊어버려진 계급’ 2회 연재는 소작농민이 직접 쓴 기고문입니다. 17년 간 서간도에 개간한 논 7000정보, 즉 2100만 평은 모두 우리 농민이 피와 땀을 흘려 일궜다고 했죠. 이렇게 넓은 땅을 논으로 바꿔놓았지만 결국 중국인이 차지할 뿐 우리 농민은 아침저녁으로 끼니 걱정만 한다고 했습니다. 간도의 우리 농민에게 일상의 권력자는 중국인 지주였습니다. 지주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 목숨이 오락가락했기 때문이었죠. 그렇지만 우리 농민은 해가 갈수록 정든 고향을 떠나 간도를 향해 길을 나섰습니다. 고향에서는 일제가 불러들인 일본 농민에게 밀려 갈아먹을 땅조차 없었기 때문이었죠.

이진 기자 leej@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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